제주에 와 있다. 석양 무렵 월령리 해안길을 따라 걷다가, 한 무리의 선인장을 발견했다. ‘백년초’라고도 불리는 제주의 토착 식물이다. 가시라고 하기엔 턱없이 귀여운 돌기가 달린, 손바닥만 한 줄기 서너 개 위에 자줏빛 열매를 이었다. 열매는 위통과 변비에 약으로 쓰이고, 요새는 음료나 잼의 형태로도 소비되는 모양이다. 여행객이 해안가 바위에 붙어 있는 선인장을 잡아 뜯거나 열매를 채취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군락지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42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볼품도 없는 한 떼의 선인장 따위가 무슨 천연기념물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들이 얼마나 귀한 손님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가 태평양에 바로 면해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바다를 태평양이니, 대서양이니, 인도양이니, 남극해니 나누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난센스다. 각각의 대양은 칸막이로 나뉜 아쿠아리움의 수조들이 아니다. 바닷물은 남반구에서 북반구, 적도와 극지를 넘나들며 뒤섞이고, 흘러가며, 돌아온다.
월령리 해안가의 선인장들은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원래 모든 선인장의 고향은 중남미 지역이다. 건조한 사막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이들은 특수한 형태의 광합성 방법을 발전시켰다. 일반적인 식물들은 밤낮으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빛과 물을 더해 에너지원인 포도당을 만든다. 하지만 사막에서 낮에 숨구멍을 열었다간, 그 틈으로 몸 안의 수분이 금세 증발해버린다. 그래서 선인장들은 밤에만 숨구멍을 연다. 밤사이 빨아들인 이산화탄소를 몸 안에 저장해놓았다가, 낮이 되면 광합성 작용을 일으켜 포도당으로 바꾸는 것이다. 선인장의 생육이 느린 이유다. 다른 식물이 공장과 창고를 동시에 가동한다면, 선인장은 창고 작업을 마친 후에야 공장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남미의 자연에 특화되어 진화한 선인장이건만 발견되는 곳은 아프리카 남부,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제주도에 걸쳐 있다. 이들이 씨앗 형태로 해류를 타고 흘러왔기 때문이다. 가장 가혹한 환경을 견딜 수 있도록 진화한 식물인 만큼, 동아시아의 추위와 열대우림의 습기를 견디는 능력 또한 금세 습득했다.
차선이 그어지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도로 위에서도, 자동차의 흐름은 이내 몇 가닥으로 정리된다. 대양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정표도, 유도선도 그어져 있지 않지만 바닷물에는 정연한 흐름이 있다. 지구의 자전과 대기 움직임에 따라 작동하는 이 컨베이어벨트의 이름은 ‘해류’다.
이 흐름이 멎는 날, 지구상의 모든 생명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 선인장 씨앗이 바다 건너 ‘백년초’ 되었네
그 흐름들 가운데서도 특급열차에 해당되는 것이 몇 있다. 남극에서 남미 대륙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페루 해류, 적도를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적도 해류, 적도에서 아시아로 북상해 미국 서해안에 이르는 구로시오 해류다. 선인장 씨앗이 그런 것들을 알았을 리 만무하지만, 그들은 바다를 건너왔다. 여기엔 기막힌 몇 번의 우연이 겹쳤을 터다.
어느 날 페루의 해안사막을 떠난 선인장의 씨앗 몇 톨은,
운 좋게 바다의 특급열차에 올라탔을 것이다. 더 운이 좋게도
몇 번의 환승역을 놓치지 않고 열차를 갈아타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주라는 낯선 역에 내려선 이들은, 먼저 도착한 세대의 실패를 딛고 차츰 이 강산에 어울리는 몸으로 변모해갔을 것이다. 언제 고향을 떠나왔는지도 가물가물해진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은 더 이상 ‘오푼티아 피쿠스 인디카’가 아닌 ‘백년초’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
타고난 항해사 사모아의 사내들
타고난 항해사 사모아의 사내들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붉은 술이 달린 화려한 관을 쓴 여성 주변으로, 반라의 사내들이 모여 앉는다.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이의 구령에 따라 흙탕물 색을 띤 음료가 준비된다. 마을 젊은이 중 가장 용...
-
바다에서 읽는 인간의 용기
바다에서 읽는 인간의 용기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인터넷에서 지도를 열어 하와이를 입력해보자. 모니터의 중앙에 하와이가 나타났을 때, 마우스를 아래쪽으로 돌려 줌아웃을 한다. 당신의 눈앞엔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
-
식인 풍습은 궁극의 복수?
식인 풍습은 궁극의 복수?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뼛조각으로 코에 피어싱을 한, 두꺼운 입술과 검은 피부의 사내들. ‘식인종’이라는 단어에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진부함과 무책임함으로 점철된 이 묘...
-
길을 찾고 길을 넓힌 사람들을 위하여
길을 찾고 길을 넓힌 사람들을 위하여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텔레비전에서 ‘먹방’이 대세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남북 화해의 분위기에 맞춰, 이젠 평양 맛집 탐방까지 화면에 등장한다. 시청률 측면에서 ‘맛’의 권력은 점점 더 커져간다. 조...
-
‘보헤미안 랩소디’가 탄생하기까지
‘보헤미안 랩소디’가 탄생하기까지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1497년 7월8일, 포르투갈의 동방원정 대장 바스쿠 다가마는 배 세 척을 이끌고 리스본 항구를 나섰다. ‘항해왕’으로 불린 엔히크 왕자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동방 항로 개척을 주...
-
폐허가 된 평화의 바다
폐허가 된 평화의 바다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우리는 지구상에서 핵의 공포를 가장 크게 체감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잊을 만하면 인공적으로 조성된 지진파가 지진계에 감지되었고, 이것은 이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
-
크리스마스에는 안초비가 사라진다
크리스마스에는 안초비가 사라진다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페루의 서해안엔 멸치의 사촌 격인 안초비라는 물고기가 산다. 지천으로 널린 이 물고기는 이 지역의 풍요로운 생태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1983년 상황은 너무나 ...
-
아쿠아맨이 육지에 전쟁 선포하겠네
아쿠아맨이 육지에 전쟁 선포하겠네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최근 개봉한 슈퍼히어로 영화 〈아쿠아맨〉은 바다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해저에 가라앉은 고대문명 아틀란티스의 후예인 주인공은 수중에서 호흡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해양 생명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