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와 소설이 만났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통점이 있었다. 어떤 시간과 기억,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억은 각자 다르지만, 그 시간은 1991년이다.

영화는 10월31일 개봉한 〈1991, 봄〉 (권경원 감독)이다. ‘강경대 정국’ 혹은 ‘분신 정국’이라 불렸던 1991년 5월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13명의 시민과 대학생이 정권에 의해 죽임당하거나,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강기훈씨.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일컬어진 사법 날조극의 피해자였다.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무죄가 입증됐지만, 강기훈은 24년 만인 2015년에야 무죄가 되었다.

소설은 하명희 작가의 〈나무에게서 온 편지〉다. 1991년 거리로 뛰쳐나온 고교생들의 이야기다. 대학생이나 사회운동 진영이 아닌, 고교생의 경험으로 1991년 5월을 말한 유일한 문학작품이다. 그 고교생들은 이른 나이에 사회운동에 뛰어든 죄로 이름 없이 사라져갔다. 학교에서 쫓겨난 이도, 세상을 등진 이도 많았다. 소설은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하 작가는 이 작품으로 2014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사IN 조남진

영화감독과 소설가는 모두 ‘잊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1991, 봄〉은 강기훈의 삶을 따라가지만 강기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때 그 시간에 남겨두고 온 수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권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내내 하명희 소설가의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꼭 품고 있었다고 한다. 권 감독은 소설을 읽고, 1991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두 사람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조우했다. 명동성당은 당시 모든 투쟁의 중심이었다. 구속되기 직전까지 강기훈씨가 농성을 벌이던 곳이기도 했다. 하명희 소설가는 당시 명동성당 옆 계성여고 3학년이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권경원 감독에게도 명동성당은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따로 사회를 볼 필요도 없이 둘은 만나자마자 말문이 트였다. 낙엽이 비처럼 내리는 11월의 오후였다.

권경원:하명희 작가와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두 번 읽었다. 나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생 때 전교조 집회에 나갔다가 안동대에서 분신한 김영균 선배를 알게 되었다. 그 선배 역시 고교생 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나도 이런저런 참여를 했다. 그래서인지 소설이 나에겐 시처럼 읽혔다.

하명희:나도 영화를 세 번 봤다(웃음). 영화에서 울컥했던 부분은 당시 노동자 출신으로 죽음을 택한 이정순씨 동생이 ‘우리는 학생이 아니지 않느냐’라며 흐느끼는 장면이었다. 난 당시 광주에서 고교생 신분으로 분신한 김철수씨 같은 이들이 가장 소외됐다고 생각했는데, 더 많은 이들이 거기 있었다.

권경원:영화에 김철수씨 육성 유언이 나오는데, 하 작가가 유언 녹음본의 존재를 알려주어서 이를 영화에 쓸 수 있었다.

하명희:1991년을 기록하면 영화가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강기훈씨 사건은 ‘5분이면 해결될 일’이 24년이나 걸린 사건이었다. 내가 소설을 쓰는 과정은 내 기억을 소환해서, 기억과 싸우는 것이었다. 권 감독은 이 기억을 현재로 끌어간다.

ⓒ인디 플러그 제공영화 〈1991, 봄〉은 강기훈의 삶을 따라가지만 강기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는 영화의 장면들.

권경원:이 영화를 극장에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세월호 때문이었다(강기훈씨 딸이 단원고 희생자와 동갑내기다). 1991년 이후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죽음을 보았다. 삼풍백화점 붕괴가 그랬고, 성수대교 참사 때도 무학여고 학생이 죽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들’이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리가 1991년의 죽음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아이들도 세월호 친구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명희:우리 삶 전체로 보면 분명 어떤 각성이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여론 속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떤 사회적 기억으로도 환원되지 못하고 한순간 소멸됐다. 강기훈씨에 대해서도 당당하면 명동성당에서 제 발로 나가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명동성당에서 그의 뒷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참 쓸쓸했다.

권경원:영화에서 처음 공개되는 장면이 있다.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 사건이 조작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뒤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는 모습이다. 당시 그 장면은 뉴스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사회는 강씨의 그런 모습을 원치 않았다.

하명희:마지막 장면에서 전율을 느꼈다. 유서를 대필했다는 강기훈이 그 손으로 기타를 치는 모습. 이렇게 삶은 덤덤히 흘러간다. 우리 잠시 서서 그의 음악을 들으며 1991년을 기억하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권경원:촬영을 위해 안동대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김영균 열사가 활동했던 동아리 인근 건물 벽에 ‘타도 노태우’라는 문구가 아직도 남아 있더라. 저 건물 벽 문구처럼 1991년의 흔적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디 플러그 제공강기훈씨가 유서 대필 사건이 조작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뒤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고 있다. 영화에서 처음 소개된 장면이다.

하명희:나는 소심해서 한 번도 그런 구호를 외쳐보지 못했다. 어느 날 시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종이에 ‘살인정권 물러가라’라고 썼다.  

권경원:1991년은 1987년과 너무나 달랐다. 1991년 명동성당은 완전히 고립됐다. 강기훈씨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게 전달됐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는 1990년 3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 합당을 거쳐 1991년에 철저하게 무너졌다. 나는 3당 합당 체제가 촛불혁명에 와서야 금이 간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내 의문은 이런 것이다. 1987년은 이야기하면서 왜 1991년은 이야기하지 않을까. 1987년은 으스대기 좋은 승리의 역사지만, 1991년은 그렇지 못해서? 1991년이 패배의 역사라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패배다.

하명희:1987년에도 사실 승리하지 못했다. 1987년의 결과가 1991년이었으니까. 그 후 우리는 기억을 멈춘 채 그 시절을 껑충 뛰어넘었다.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학계에서도 1991년에 대한 접근은 활발하지 않았다. 이제야 그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중이다. 최근 전남대에 박승희 열사를 기리는 ‘승희꽃밭’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권경원:나는 강기훈에게 1991년이라는 딱지를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 시대가 강기훈이라는 피해자의 이름으로 기억돼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잊힌 이들을 충실하게 애도해야 했다. 당시 1991년의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한 번이라도 그때 그 시간에 두고 온 마음과 마주했으면 좋겠다.

하명희:어쩌면 사람들은 그때 그 기억이 불편한지도 모른다. 기껏 지워놨는데 왜 다시 건드리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원히 가둘 수는 없다. (이 영화가 나옴으로써) 다음에는 누군가 더 자유롭게 1991년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권경원: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예를 들면 각 대학 민주동문회 같은 곳에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오히려 놀랐던 건 젊은 친구들 반응이었다. 어느 학교는 13학번 친구가 민주동문회 선배들에게 영화를 함께 보자고 했다더라.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 가운데 1988년생, 그리고 1991년생 기자도 있었다(웃음). 어떻게 보면 지금 후배들이 더 외롭지 않을까. 인권운동이나 소수자 운동하는 친구들은 1991년 우리보다 더 고립돼 있는지도 모른다.

하명희:고교생 딸과 함께 영화를 봤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전철에서 노트에 뭘 적더라.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주 강인해 보였지만, 실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썼더라. 역사를 몰라도, 어떤 감수성은 통한다고 느꼈다.

권경원:내가 스스로 1991년에 대한 편집증에 갇혀 있지 않나 의심하기도 했다. 혹시 내가 굳이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할 걸 이야기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민주화의 흐름에서 1991년을 빼놓는 건 너무나 큰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하명희:〈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쓴 뒤에 친구에게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다른 이들은 위로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왜 고이 간직한 자기 경험을 밖으로 드러내느냐는 불만이었다. 그 뒤 학벌없는 사회나 청소년단체에서 반응이 오더라.  

권경원:얼마 전 〈1991, 봄〉을 체코 프라하에서 상영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왜 프라하일까 했는데 1969년 체코에서도 젊은이들의 연쇄 분신자살이 있었다. 얀 팔라흐라는 대학생이 시작이었는데,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무력 진압으로 짓밟힌 뒤였다. 체코 경찰은 자살의 배후를 캐내겠다고 했고, 세간에는 비밀 자살조가 있다는 소문까지 번졌다. 그런데 그 후 애도는 달랐다. 체코인들은 얀 팔라흐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고, 당시 슬픈 기억을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 미국 케이블 TV HBO에서는 얀 팔라흐의 이야기를 〈타오르는 불씨(Burning Bush)〉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자크 데리다도 말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