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관련 강연을 하면 청중을 상대로 묻는 질문이 있다. “이 중에 시 쓰는 분 있으면 손 들어보시겠어요?”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손을 드는 수는 극히 적다.

가끔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이 중에 시를 쓰는데 쑥스러워서 손 안 드시는 분 있으면 손 들어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청중들은 실소를 터뜨리지만 강연 후 몇몇 청중이 나에게 다가와 실은 시를 쓴다고 밝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나도 그랬다. 나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었고 시 창작 관련 수업을 들은 적도 없었다. 주변에 시를 쓰는 친구들도 전무했다. 간혹 용기를 내어 친한 친구들에게 내가 쓴 시를 보여줬지만 반응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이기 일쑤였다. 등단 전까지 나에게 시 쓰기는 혼자 쓰고 읽고 좋아하는 비밀이었다.

등단을 하고 시집을 내면서 사회적으로 ‘시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미디어와 지면, 문학 관련 행사 자리에서 나는 시인으로 소개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 시에 관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한때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조차 머릿속에 시인에 대해 우호적인 환상이나 인상을 가지고 있던 적이 있었다. 시를 쓴다고 하면, “시는 잘 모르지만 대단하시네요”라고 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환상이나 인상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내 친구들 중에는 시인을 여전히 명예로운 직업으로 생각하고, 나를 “이분 시인이세요”라고 소개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상대방의 반응은 “아, 예(어쩌라고요)”일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친구들에게 부탁한다. 나를 타인에게 시인으로 소개하지 말라고. 그건 내가 겸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단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인의 시인됨에 대해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관심이 타인에 대한 무례한 호기심이나 편견, 혹은 특정 직업에 대한 무지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리스크를 취하려 하지 않고 나 또한 그런 리스크에 사람들을 휘말려 들게 하고 싶지 않다.

 

ⓒ시사IN 윤무영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시인인 나 자신도 일상과 사회생활에서 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등단을 아직 하지 않았거나 혹은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시를 쓰는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나는 주말에 등산해요”와 “나는 밤에 시를 써요”의 어감은 절대로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 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물론 시에 대한 대화는 매우 흥미롭게 흐를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 주제를 다룰 때에 주로 그러하다. 예컨대 문학과 관련된 강의와 강연에서, 시를 쓰는 창작자들 속에서,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동아리 회원들 앞에서. 그런 경우들을 제외하면 시를 가지고 대화를 할 자리는 거의 없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왜 시에 대해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 나는 지금 시를 특별대우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시가 평범해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음 좋겠다. 누구나 시에 대해 이야기했음 좋겠다.

드물지만 그런 자리가 마련될 때가 있다. 본격적이지 않아도 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당당하진 않아도 자신이 쓰고 외운 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공유할 때가, 전부는 아니라도 비밀의 일부를 서로에게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가 직업이기에 앞서 하나의 독특한 언어활동, 언어적 쓸모와 경험을 확장하는 소통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다른 모습, 조금은 경이롭고 매혹적이고 근사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시인은 없어져도 시 쓰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 안에 우리를 넘어선 존재가 숨어 있는 한 말이다.

기자명 심보선 (시인·경희사이버대학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