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4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4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 의혹이 불거진 뒤 임 전 차장은 전·현직 법관 중 처음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차기 대법관 1순위’로 평가받던 그는 이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 검찰은 이날 임 전 차장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무상 비밀누설, 형사사법절차 전자화촉진법 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직무유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공전자기록 등 위작 및 행사 등 8개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한,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 전 대법관을 11월19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한다. 검찰 수사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법 농단 의혹은 대법원 1·2·3차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를 통해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독대를 앞두고 2015년 7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현안 관련 말씀 자료’ 문건은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불씨를 댕겼다. ‘사법부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다’라는 문구와 더불어 예시로 ‘긴급조치 국가배상 판결’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댓글 사건 판결’ 등이 언급됐다. 양승태 대법원이 ‘무엇’을 했는지 드러날수록 의문은 짙어진다. 대법원이 스스로 사법부의 독립을 해친 사법 농단 의혹의 실체는 무엇이고 이에 발은 담근 판사들은 누구일까. 법원과 법관 사회를 잘 아는 전·현직 판사들을 만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봤다.

ⓒ연합뉴스9월1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시민단체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의 탈을 쓰고 구속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 “윗사람이 시키면 군말 없이 잘한다”

사법 농단 의혹의 중심에 법원행정처가 있다. 의혹에 관여한 전·현직 법관들 절대다수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했다. 구속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2년 8월 법원행정처 실세 자리인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된 뒤 2015년 3월 차관급인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승진했다.

각급 법원의 재판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것이 법원행정처의 본래 역할이다. 그러나 대법원 소속으로 사법부 전체의 행정을 총괄하고 대법관이 처장을 맡는 법원행정처는, 실제로는 권력을 쥔 핵심 기관이다. 법원 내에서는 출세 코스로 통한다. 35명 전후 규모의 법원행정처 법관들은 엘리트 판사들이다. ‘심의관’은 법원행정처에서 가장 낮은 직급이지만 법원에서 단독 재판을 맡는 10년차 판사들이 간다. 법원행정처 파견 기간에 법관들은 재판을 맡지 않고 사법행정 업무만 전담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원행정처 판사들에 대한 공통된 평가는 “예의가 바르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능력이 뛰어나 ‘에이스’로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윗사람이 시키면 군말 없이 잘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신임을 얻은 임종헌 전 차장은 사법부의 ‘마타하리’로 통했는데 모든 일을 맡아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연합뉴스10월28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중앙지검으로 향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 자체 조사 결과 업무 배제 조치가 내려진 이민걸·이규진·정다주·박상언·김민수 판사 모두 법원행정처에 근무할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에 관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법농단TF 탄핵분과장으로 국회에 이들에 대한 탄핵소추를 요청한 서기호 변호사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법원행정처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매너 좋고, 성격 좋고, 실력 뛰어나고, 체력 좋고, 술도 잘 마시는 분들이다. 한마디로 에이스 법관. 이분들은 후배 판사를 대할 때도 선입견을 가지고 대우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예의 바른’ 소수 정예 엘리트 법관들이 모인 법원행정처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기 7년 중 알려진 것만 해도 5년간, 사법 농단 의혹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 기간에 2~3년 임기로 법원행정처를 거쳐간 엘리트 법관 가운데 잘못된 지시를 적극적으로 거부한 이는 2017년 2월 기획조정실 제2심의관으로 임명된 이탄희 판사가 유일했다.

이 판사는 이규진 당시 법원행정처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들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해당 업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가 반려되는 대신 이 판사는 원래 근무지인 수원지법 안양지원으로 복귀했다. 이 일이 발단이 돼 한 달 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언론에 폭로됐다.

이탄희 판사의 법원행정처 발령은 의외의 인사였다. 이 판사는 개혁적 성향의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주축 멤버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위축시키기 위해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이 판사를 잘 아는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하면서 외부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핵심 인력을 빼간 게 아닌가 추측된다”라고 말했다.

■ “튀는 재판을 하지 말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취임해 2017년 9월 퇴임했다. 그의 임기 대부분이 이명박 정권 후반기와 박근혜 정권 시기에 해당한다. 양 전 대법원장은 권위주의 시대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체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법 농단 의혹이 불거졌다는 해석도 법원 내부에서 나온다. 사법부라는 조직을 지키기 위해 몇몇 재판은 희생돼도 된다는 논리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로완 중위’ 이야기를 즐겨 언급했다. 로완 중위는 19세기 말 미국 군인으로 쿠바를 두고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대통령의 밀서를 반(反)스페인 지도자 가르시아 장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성공시켰다. 이 일화가 회자되는 건 가르시아 장군의 소재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장군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즉각 실행에 옮겼다는 점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사법연수원생 수료식이나 판사 간담회에서 이를 법관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로 꼽았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이런 ‘로완 중위’들로 채워졌다. 그중 두각을 낸 핵심 라인으로 법원행정처장이었던 박병대 전 대법관과 그 밑에서 일했던 임종헌 전 차장이 꼽힌다. 양승태 대법원에서는 재판 독립 원칙에 따라 소신 있게 재판하는 판사보다는 대법원장 방침을 따르는 사법 관료가 바람직한 법관이었던 셈이다.

ⓒ연합뉴스2015년 10월 박근혜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위 오른쪽)이 건군 제67주년 경축연에서 대화하고 있다.

일선 법원에서 근무하는 한 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철학에 철저히 동의하는 사람이다.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 문건을 보면 집회 시위나 노동자들에게 굉장히 적대적이다. 철저하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교조나 강제징용 피해자를 보면 ‘나라를 위해서 저러면 안 되지’ 하는 거다.” 양 전 대법원장은 판사들에게 “튀는 재판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의 로펌이 되었다”

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한 판사는 “판사들은 기본적으로 사법부가 약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사법부에는 조직의 실질적 힘을 뒷받침하는 예산권과 법률안 제출권이 없다. 예산을 증액하거나, 법원조직법 개정 등을 법무부나 국회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삼권분립을 위한 견제 시스템 중 하나이지만 판사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취약한 구조이다. 개혁적이든 보수적이든 판사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조직 보호 논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사법부 내 조직 보호 논리는 더욱 공고해졌다. 양승태 대법원이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권과 재판 거래에 나섰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전·현직 판사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이 ‘사법부의 위상 강화’라고 말한다. 상고법원 도입은 사법부 강화로 나아가는 길에 있는 부수적인 사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양승태 대법원은 청와대, 국회와 접촉의 밀도를 높였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에는 설득을 통해 법원에 필요한 예산과 법률안을 얻고자 청와대나 국회를 찾았을 거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원하는 걸 알게 됐을 텐데 사법부에 바라는 건 뻔하다. 재판 아니면 재판에 유리한 법률적 사무, 이 두 가지다.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사법부를 위해 현실적으로 타협해야 한다는 조직 보호 논리가 여기서 작용했을 것이다. 그 결과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국회의 로펌이 돼버리고 사법 농단까지 이어졌다.”

양승태 대법원은 역시 조직 보호 논리를 앞세워 판사를 뒷조사하는 등 법관 통제를 강화했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비판적이었던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문건에는 연구회 핵심 회원들을 “사법부에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지칭한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한 판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법부가 아니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정책에 반대한 거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사법부와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조직을 위협하는 내부의 적이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개혁적 성향의 한 판사는 “현재 사법 농단 연루자로 언급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권자인 고위 법관들의 눈에 들어 승진하고 싶다는 개인적 욕심도 있었겠지만, 그 이전에 사법부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위험하고 지저분한 일을 한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은 역설적으로 사법체계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재판과 법관의 독립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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