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7년 7월8일, 포르투갈의 동방원정 대장 바스쿠 다가마는 배 세 척을 이끌고 리스본 항구를 나섰다. ‘항해왕’으로 불린 엔히크 왕자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동방 항로 개척을 주창한 지도 어느덧 70여 년, 마침내 그 끝을 보고야 말 참이었다. 배 세 척은 구조와 크기가 똑같았다. 한 척이 고장 나더라도 다른 배 부품으로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동방의 향신료를 싣고 돌아오기만 하면 갑부가 되었기에 선원 180여 명을 모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원 가운데는 사형수도 18명이나 있었다. 사형수 선원들의 임무는 항해 중 만나게 되는 원주민들과 첫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운 나쁘게 호전적인 원주민을 만나면 벌을 받을 것이고, 환대를 받으면 그간의 죄를 사해주는 대신 함대가 돌아올 때까지 현지에 남아 원주민 사이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포르투갈은 미지의 세계를 잇는 정거장을 만들고자 했다.

ⓒ시사IN 고재열잔지바르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생가.

희망봉을 돌자마자 나타나는 나라, 모잠비크가 지금껏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연유다. 모잠비크 이외에도 과거 포르투갈의 정거장 구실을 했던 지역들은 아프리카의 동해안을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다. 탄자니아에 속한 섬인 잔지바르(Zanzibar)역시 그중 하나다.

이전부터 인도인, 페르시아인, 아랍인이 뒤섞이며 인도양의 무역기지 노릇을 해온 이 섬은 바스쿠 다가마의 동방원정이 성공을 거두고, 포르투갈이 지금의 인도와 말레이시아에 진출해 향신료 무역에 열을 올리면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 섬 지형이라 대형 선박이 드나들기 쉽고 방어에도 용이했다.

17세기 말 포르투갈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권은 오만 왕조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향신료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무역항으로서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오며 영국 역시 이곳에서 철수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페르시아계 인도인이었던 보미 불사라가 잔지바르로 이주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중동 지역에서 인도 북부로 이주한 ‘파르시’ 민족 출신인 그는,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의 공무원 일자리를 얻었다. 백인들만큼 봉급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인과 자동차가 있는 상류층의 생활이었다. 1946년 그는 첫아이를 낳는다.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 그가 바로 밴드 ‘퀸’의 싱어 프레디 머큐리이다.

인종과 문화와 성정체성의 경계 속에서 방랑했던 보헤미안

위태로운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960년대 들어 영국은 잔지바르에서 손을 뗐고, 아랍계 집권층과 아프리카계 피지배층 간의 갈등 속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불사라 가족도 1964년 모든 살림살이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올 수밖에 없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 시기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안락했던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틈이 나면 공항에서 하역 잡부 일을 하며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주변인으로서 삶을 이어가던 파로크 불사라. 그는 밴드 ‘퀸’의 싱어로 변신하면서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생에서 ‘마음 쉴 곳 없는, 세상에서 외면받은, 세상의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해 노래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그러한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이야기해주는 노래는 다름 아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보헤미안 랩소디’다. 누구나 눈독 들이지만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던 섬에서 태어나, 인종과 문화와 성정체성의 경계 속에서 한평생을 방랑했던 영원한 보헤미안, 프레디 머큐리. 그의 노래에서 인도양의 바닷바람과 이따금씩 몰아치는 미친 듯한 폭풍우가 느껴지는 것은 중년 아저씨의 과한 감성 탓일까.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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