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에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 에밀 페리스는 이 한 권의 그래픽노블로 2017년 이그나츠 어워드, 2018년 아이스너 어워드를 휩쓸었다. 이 그래픽노블의 큰 축은 작가의 분신으로 짐작되는 소녀 캐런 레예스의 이웃이자 캐런이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앙카의 사망 사건을 풀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추리물에 그치지 않고 스토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는 사람 눈에는 더 보이는, 그래서 공감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장치가 책 전체에 가득하다. 특히 미술에 대한 작가의 조예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독자에게는 몬스터처럼 보이는 주인공, 뻐드렁니의 캐런이 살던 배경은 1960년대 시카고. 암울하고 기이하고 어두운 도시의 풍경이 마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과연 앙카의 죽음은 자살이었을까, 타살이었을까? 총성 한 발과 조용히 침대에 누운 채 발견된 시체.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남편 실버버그? 처그 아저씨? 그로넌 씨? 캐런의 엄마 마벨라? 캐런의 오빠 디즈? 그로넌 부인?
소녀 캐런은 탐정처럼 하나하나 베일을 벗기며 사건을 해결하려 애쓴다. 추적 과정에서 앙카가 인터뷰한 테이프 내용을 듣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앙카의 과거가 밝혀진다. 나치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기도 했던 앙카의 삶을 엿보는 일은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슬프기 짝이 없다. 사람이 괴물이고, 그런 괴물의 노예가 되기도 하는 험한 세상을 경험했던 앙카.
늑대 소녀의 환상 속에 사는 캐런은 어서 몬스터에게 물려 진짜 늑대 소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도 모두 몬스터가 된다면 암에 걸린 엄마도, 불행한 시대의 산물인 오빠 디즈도 이 폭력(물리적·정서적)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늘 왕따였던 학교생활, 그토록 탈출하고 싶던 학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며
이 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다양한 코드의 독서가 가능한, 놀라움으로 가득 찬 책이다. 어떤 이는 스프링 노트에 하나하나 펜으로 그려간 작가의 섬세하고 섬뜩한 그래픽에 감탄하며 책장을 넘길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액자소설 형식의 서사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책 곳곳에 숨은 사회와 시대의 부조리와 폭력을 읽으며 분노할 수도 있고, 살인 사건을 추적하며 보여주는 미스터리 호러 장르의 신비한 매력에 빠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다루는 미술에 대한 지식과 그 해석, 예술적 심미안에 탄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 전체를 통해 헨리 푸젤리의 〈악몽〉,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자에게 공격받는 아랍 기사〉,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코르넬리스 사프트레벤의 〈마녀의 안식일〉,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장레옹 제롬의 〈여인의 초상〉 등 대가들의 명화(작가 에밀 페리스가 다시 해석한 그림)를 바라보며 어린 소녀 캐런이 오빠 디즈에게 배웠듯, 그림을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며’ 감상하는 법에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꼬마 몬스터 캐런이 이끄는 방식대로 삶을 이해하는 법을 엿볼 수 있다. 캐런은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엄마의 죽음을 맞는다. 아일랜드계 북미 원주민인 엄마의 한쪽 초록색 눈, 자신의 몸을 누일 곳으로 상징되는 그 초록빛, 초록 섬을 찾아 달린다. 책의 마지막, 놀라운 반전과 함께 캐런은 존 래스본과 조지 몰런드의 〈다리 건너는 사람들이 있는 풍경〉,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샤이의 풍경〉, 조지 이네스의 〈바다 풍경〉, 클로드 모네의 〈벨 일, 굴파르 항구의 암벽들〉을 거쳐 마지막 하랄드 솔베르그의 〈어부의 오두막〉에 이르러 마지막 초록 섬을 찾아냈다고 고백한다.
이 작품을 그리던 중 작가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팔이 마비되는 고통이 찾아왔지만, 화필을 테이프로 손에 고정한 채 6년에 걸쳐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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