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매서웠다. 일찌감치 해는 떨어졌고, 거센 바람이 온몸을 때리듯 지나갔다. 확실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 김녕의 해변이었고,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이 바다였다. 춥고 어두워서 바다와 하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온 그의 손에는 회 한 접시가 들려 있었다. 맛있는 회와 그가 즐겨 듣던 음악을 안주 삼아 새벽까지 소주를 들이켰다.
내가 아는 한,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은 천생 예술가형 인간이다. 그는 그 누구와도 다른 자기만의 민감한 촉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을 온몸으로 받아낸 뒤에야 무언가를 창조하는 타입의 작곡가다. 1998년의 1집 〈18일의 수요일〉부터 갓 발매된 신보 〈오로라 피플〉까지를 아우르는 정서 하나가 있다면 이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 이기용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영역인 까닭이다. 다만, 이기용 같은 예술가는 자신의 경험을 어느 순간 뽑아 올려 우리에게 삶의 어떤 진실을 이야기해준다. 〈오로라 피플〉에서 허클베리핀은 모든 드라마가 끝난 뒤에야 찾아오는 진짜 슬픔을 노래하고, 연주한다.
〈오로라 피플〉을 복류(伏流)하는 정서는 슬픔이다. 드넓은 사운드의 공간감이 돋보이는 첫 곡 ‘항해’는 물론이요, 팝적인 선율을 담고 있는 모던 록 ‘Darpe’에서조차 슬픔은 어김없이 침투해 있다. “이슬 어린 노래로 안녕을 말해도/ 내 속에 너는 남아 있어…. 넌 나의 버려진 폐허에서/ 다시 넌 살아난다”라는 가사를 보라.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슬픔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삶에 틈입한다. 쉽게 견딜 비법도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슬픔,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다뤄야 하지 않겠는가. “슬픔을 토로하라. 그러지 않으면 슬픔에 겨운 가슴은 미어져 찢어지고 말 테니.” 〈맥베스〉의 대사다. 〈오로라 피플〉이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신 말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언제나 붙어 있지
“그땐 정말 지옥과 연옥을 왔다 갔다 했죠.” 이기용의 고백이다. 2015년 어느 날 이기용은 보컬리스트 이소영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고 한다. “소영아, 난 음악을 안 하면 안 되겠어. 네 목소리 아니면 안 되겠어. 네가 나의 모든 노래를 불렀잖아. 네가 불러야겠어.”
과연 그렇다. 음반의 절정이라 할 ‘오로라’와 ‘오로라 피플’에서 이소영은 허클베리핀 역사상 가장 깊고 진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슬픔이 서려 있는 이 곡들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작가 조지 맥도널드가 쓴 것처럼 ‘아름다움과 슬픔은 언제나 붙어 있는 것’이라면 〈오로라 피플〉의 수록곡들은 그에 대한 예시로 모자람이 없을 거라고 믿는다. 그도 아니면 오스카 와일드의 저 유명한 다음 격언은 어떤가.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聖地)가 있다.”
2015년 싱글 ‘사랑하는 친구들아 안녕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사이에 잠시 지옥에 다녀왔어’를 설명하면서 나는 이렇게 적었던 바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체험이건,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함에 맨몸으로 노출되었던 자가 써 내려간 육필 수기. 이 곡이 먼저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6집은 허클베리핀 역사상 가장 깊이 있는 앨범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 6집이 〈오로라 피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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