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시작부터 화기애애했다. ‘도서관’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500원씩 벌금을 내면 재미있겠다는 내 제안에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행 끝날 때쯤에는 가산을 탕진하겠다는 농담이 오갔다. 우리가 묵었던 도쿄게이자이 대학 국제교류회관에 와이파이가 되지 않아 난감해하다가 “그럴 땐 도서관에 가야지!” 하는 말을 의기양양하게 꺼내는 이들이었다. 그야말로 ‘도서관’이란 단어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한 ‘오타쿠’들의 여행이었다.
우리가 둘러본 도서관은 총 13곳으로 도쿄 도립도서관 1곳, 대학 도서관 3곳, 전문 도서관 1곳, 일반 공공도서관 8곳이었다. 2017년을 기준으로 도쿄 도에는 소규모 분관을 제외한 공공도서관이 총 397개가 있으니 우리가 둘러본 도서관은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글은 도쿄 도서관에 대한 종합 분석이라기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소수의 샘플 도서관에 대한 방문기이다.
도쿄 도 무사시노 시에 위치한 ‘사람·거리·정보창조관 무사시노 플레이스’(이하 ‘무사시노 플레이스’)는 건물 외관부터 눈길을 끈다. 2011년 개관한 이 도서관은 건물 사방으로 타원형 모양의 커다란 창이 나 있어서 건물 밖에서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슬쩍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내부에서도 외부, 즉 세상과 이어져 있는 연결성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잡지 창간호 7100종 보유
무사시노 플레이스는 도서관 서비스뿐만 아니라 평생학습과 시민단체 활동도 지원하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그래서인지 같은 규모의 도서관에 비해 장서 규모는 총 14만여 권으로 그 수가 적은 편인데, 잡지만은 600여 종을 갖추고 있어서 시민들이 다채롭게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지하 2층의 청소년 공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음악·춤·공작·요리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으며, 커다란 홀 안에 청소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 읽고 게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학생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와서 마음껏 머물러도 괜찮은 공간이 있구나 싶은, 그들을 위한 창조적인 놀이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상 3층의 워크라운지 또한 무사시노 플레이스의 ‘핫플레이스’다. 열댓 명 내외가 조그만 룸에서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기에 물어보니, ‘쓰레기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들의 모임’이란다. 앳된 여고생도 보였고,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이도 있었다.
도쿄 도서관의 부러운 점 중 하나는 한국 도서관에 비해 훨씬 다양한 잡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잡지 강국의 면모이면서 동시에 도서관으로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일종의 작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행본에 비해 잡지는 한 권 전체를 완독하는 경우보다 부분을 발췌해서 읽는 경우가 많다. 책보다는 단편적이지만 짧기에 최신 정보를 습득하기에 좋다. 그래서인지 도쿄 도는 2개 도립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2009년에 개관한 도쿄 도립 다마도서관은 잡지 제공을 서비스의 중심에 두고 있었다(나머지 하나는 도쿄 도립중앙도서관이다). 총 1만8000여 종의 잡지가 도서관 전체에 가득 있어서 일본의 잡지 문화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기에 적합하다. 1877년부터 현재까지 약 7100종의 잡지 창간호를 보유하고 관리하는 도서관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어린이와 청소년 자료를 22만여 권 소장하면서 관련 연구의 산실 역할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살펴본 곳 중 건축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던 도서관을 꼽는다면 무엇보다도 다마 미술대학 도서관(하치오지 캠퍼스)이었다. 이 도서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났으며 프리츠커상, 왕립 영국건축가협회 금메달, 황금컴퍼스상 등 세계적인 건축상을 연이어 받은 건축가 이토 도요의 설계로 2007년 지어졌다. 이곳은 대학 도서관이기도 하다. 관람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 2주 전에 미리 투어 신청을 하지 않으면 출입이 어렵다. 일본 대부분의 도서관이 그러한데 사진 촬영 역시 엄격한 제한 속에서 이뤄진다.
이번에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는 공공도서관 두 곳을 살펴보자. 관공서가 밀집해 있는 도쿄의 중심부, 히비야 공원 안에 있는 히비야 도서문화관은 1908년 개관한 이래, 일본 도서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관동대지진을 겪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건물이 전소된 적도 있다. 현재 도서관은 독특한 삼각형 건물로 2011년 재개관한 것인데, 전통적인 일본 종이와 창틀로 장식된 창문에서 과거를 이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데 재개관과 함께 이 도서관은 새로운 도시형 공공도서관 모델을 구현하려 하고 있었다. 도쿄 중심부라는 지역 특성을 고려해 비즈니스 지원 서비스를 특화해 제공하며, 역사와 문화를 품은 ‘뮤지엄’의 기능, 강좌나 이벤트 등 ‘대학’의 기능까지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4층 특별연구실에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고서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1층과 지하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등도 있어서 시민들에게 다채로운 읽을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를 한꺼번에 갖춰놓은 듯했다.
히비야 도서문화관의 경우, 외부 기업의 유입을 통해 기존 도서관 범주에서 벗어난 역할을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용자가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핵심은 공공부문과 민간단체 등 여러 운영 주체가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방법을 찾으면서, 동시에 이들 간의 협업을 원활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어떻게 꾸릴 수 있느냐에 달린 듯했다.우라야스 도서관이 던진 감동마지막으로 소개할 도서관은 〈우라야스 도서관 이야기〉(일본어판 1989년, 한국어판 2002년 출간)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우라야스 시립중앙도서관이다. 우라야스는 도쿄 외곽의 어촌 지역을 매립해서 만든 신도시로, 시민들의 적극적인 이해와 요구를 받아안아 혁신적인 도서관을 만들어냈다. 나 역시 도서관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시절 감동적으로 그 사례를 보던 기억이 있는데, 이곳을 직접 방문한다는 게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관한 지 35년이나 된 도서관이기에 쇠락해가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것은 기우였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조금만 둘러봐도 안다. 이 도서관이 얼마나 활기 넘치는지, 이용자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친근한 공간인지, 사서들이 얼마나 윤기를 내왔는지 말이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도서관은 온기를 품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번 여행 중 둘러본 모든 도서관 가운데서 우리 동네에 가장 옮겨놓고 싶은 도서관이 바로 이곳이었다. 과거의 빛나는 이력을 켜켜이 이어오고 있구나 싶어 이런 도서관을 유지해오는 힘이 몹시 부러웠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마냥 부러움만 품고 있어선 안 된다.’ 나에게 비록 큰 힘은 없지만, 한국에 돌아오면서 커다란 숙제를 짊어지고 온 기분이다. 이곳에서 말하고 전해야 할 숙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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