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대상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 법이다. 단어 몇 개만 적어두어도 나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세월과 함께 흘러간 뒤엔, 몇 개의 단어는 풀기 힘든 수수께끼나 뜻 모를 암호에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먼 훗날 독자를 위해 시시콜콜 전부를 기록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결국 남겨진 단어를 풍부하게 되살려 그 아래 쌓인 침묵의 전제들을 밝혀내는 것은 후대 학인의 몫이다.
실학자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도 이런 식으로 불친절한 책이다. 18세기와 19세기 조선의 풍속을 담긴 했으되, 자세히 풀지 않고 핵심만 맵시 있게 짚어낸다. 예를 들어, 종이는 설화지(雪花紙)와 죽청지(竹淸紙)가 최고라며 짧게 규정하고 넘어가는 식이다. 당시 어떤 종이들이 시중에 통용되었으며, 두 종이를 만드는 방법과 각각의 장점은 무엇이고, 왜 하필 이 두 종이가 다른 종이들에 비해 뛰어난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유득공이 살던 시절에는 첨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두 종이가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압도적으로 최상품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경도잡지〉에서 이 문장만 번역하고 넘어가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독자들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각주 몇 줄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조선의 잡지〉를 쓴 진경환은 유득공이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간 핵심을 차근차근 되씹으며 오래 머문다. 지금은 잊힌 풍속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엮고 풀어낸다. 진경환의 친절한 설명에 기댈 때, 비로소 독자들은 유득공이 선보이는 열아홉 가지 풍속의 진경(眞景)에 젖어들 수 있다. 유득공이 제시한 풍속을 어디서 어디까지 얼마나 어떤 식으로 설명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진경환의 몫이다. 설명이 넘치면 지루하고 설명이 부족하면 이해되기 어렵다. 요 딱 알맞은 균형감각은 오래 공부하고 고민한 증거이면서 욕심을 덜어낸 결과이다.
〈조선의 잡지〉는 조선 후기를 헤매는 소설가에겐 보물 같은 책이다. 역사를 소설로 쓴다고 말하면, 혹자는 고조선부터 현재까지를 모두 다룰 수 있겠다며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고려 시대를 쓸 때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삼국 시대는 접근조차 어렵다. 그 시절의 풍속을 파악하기 힘들수록, 생각과 대화만 가득 찬 기형적인 세계를 그릴 수밖에 없다. 사전이 필요하되, 지나간 그 시절의 섬세한 감각을 지니면서도 지금 여기와 다채롭게 소통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조선의 잡지〉는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서울 양반들이 지녔던 취향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넓이까지를 골고루 간직한 귀한 책이다. ‘조선의 잡지’를 창간호로 끝내지 말고, 다음 호를 계속 만들어달라고 간청하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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