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몇 없는 장점 중 하나는 기분을 잘 숨긴다는 거다. 나처럼 기쁨과 슬픔을 크게 느끼는 사람은 이런 능력이 중요하다. 감정 기복도 심한데 숨기지도 못하는 상사를 상상해보라. 여러 사람 신경 쓰이게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본인은 얼마나 창피할까. 다만 나도 감정을 못 숨기는 예외가 있는데, 애인이다. 얼마 전에도 우울한 기분을 숨기지 못해 ‘이불 킥’ 할 일을 벌였다. 옆에서 다가오는 자전거를 미처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려던 나를 애인이 급히 잡았다. 그 순간 어이없게도 눈에서 물이 나오고 말았다. 얘가 평소보다 세게 잡아당긴 것 같다, 혹시 내가 싫어졌나, 나는 왜 이렇게 덤벙댈까, 이 성격 영영 못 고치겠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다행인 건 뇌의 다른 부위에서는 이런 생각도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울할 땐 뇌과학〉에서 봤잖아. 우울한 뇌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거야. 실수를 감지하는 ‘배측 전방대상피질’은 온 뉴런이 잘못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불안에 영향을 주는 ‘편도체’는 잔뜩 예민해져서 애인의 반응과 내 미래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어. 책은 이걸 ‘우울증의 하강나선’에 빠지는 거라고 표현했지. 우울한 뇌가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고. 어디 한번 계속해봐라, 이젠 안 속지.

물론 거짓말이다. 또 속는다. 내가 고작 인간이라서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려면 뇌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꿈을 꿀 때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얼토당토않은 장면을 뇌가 만들어내도 그 순간만은 진짜라 믿고 바람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날도 나는 우울한 뇌한테 속는 줄 알면서도 눈에서 물이 나오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팔다리가 얼었다.

〈우울할 땐
뇌과학〉
앨릭스 코브 지음
정지인 옮김
심심 펴냄


이처럼 우울증의 과학을 이해한다고 우울함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 머릿속의 사기꾼을 객관화할 수는 있다. 틈만 나면 거짓말을 해대는 뇌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다. 의심의 눈은 내가 하강나선에 더 깊이 빠지지 않게 돕는다. 또 책은 하강나선을 만드는 나쁜 사기꾼을 상승나선을 만드는 좋은 사기꾼으로 바꿔 차근차근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꼽은 건 무엇보다 내 뇌를 사기꾼으로 보는 관점 자체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지니면 즉각적으로 드는 감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수 있다. 효과는 애인의 행동을 곡해해 헛소리하는 일을 막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성소수자를 보고 혐오감이 드는 건 이성애 드라마만 본 미욱한 뇌 탓이란 것도 깨달을 수 있다. 내게도 타인에게도 별 도움이 안 되는 불안과 공포를 줄이는 훌륭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섣불리 감정을 표출했다 ‘이불 킥’ 하는 일도 덜고 말이다. 

기자명 이다솔 (〈동아사이언스〉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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