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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쓴 기록’에 기립박수

2019년 01월 10일(목) 제589호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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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요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독보적인 책이 없었다.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책’ 국내서의 경우 1위부터 11위까지 편차가 적었다. 골고루 약진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한 편집자의 표현대로 ‘100만 권 이상 팔린 리딩 북(leading book)이 부재한 한 해’였을 수도 있다. 에세이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책 상위 11권 중 4권이 에세이였다. 인문 교양으로 분류된 나머지 책 중에도 에세이와 비슷한 형식이 적지 않았다. 요즘은 다른 분야의 책도 ‘에세이의 결’을 가미해 출판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연합뉴스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세 권은 <골든아워> <검사내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몸으로 쓴 기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앞의 두 권은 각각 ‘현직’ 의사와 검사가 바라보는 현장의 시선이 생생하게 담겼다. <골든아워>는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이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중증외상센터에서 경험한 삶과 죽음에 대해 써내려간 책이다.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주목받은 이국종 권역외상센터장은 2002년 외상외과의 길에 들어선 뒤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에서 부상당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권역별 중증외상센터 설립과 지원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는 책에서 “중증외상 환자들이 겪는 처참한 고통과 의료인들 및 소방대원들의 분투를 정확히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밝힌다. 송성호 이상북스 대표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만이 사회의 문제점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타인의 생과 사의 갈림길을 알 수 있다. 글도 참 잘 썼다”라고 말했다.

‘순수하게 글로만 감명을 준’ 신형철 

<검사내전>은 현직 검사가 직접 검찰 안팎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저자가 현실에서 만나온 다양한 인간 군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사기 공화국’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기를 당하는지, 검찰 내의 직장 생활은 어떤지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법이 가진 한계와 역할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을 추천한 한 편집자는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여전히 재미일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문학청년이던 저자의 이력이 무색하지 않게 각각의 에피소드가 소설 한 편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또 다른 편집자는 “법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이토록 유쾌한 필치로 풀어낸 책은 처음이었다. 즐겁게 읽다 보면 저자의 법철학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출판인들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문장에도 열광했다.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추천한 이들은 ‘생존한 이 가운데 가장 미문에 가까울 글쓰기’ ‘순수하게 글로만 감명을 주는 저자’ ‘에세이 전성시대에 사유와 문장이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지난 7~8년 발표한 글을 모아보니 슬픔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슬픔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 것은 2014년 4월16일 때문이기도 하고, 2017년 1월23일 때문이기도 하다. 전자는 세월호, 후자는 그의 아내가 수술을 받은 날짜다. 그는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힌다. 

2018년은 독립출판의 가능성을 입증한 한 해이기도 했다. 순위권에 있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웹툰 <며느라기>가 대표적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독립출판물로 냈다가 입소문을 얻어 상업출판으로 이어진 경우다.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진 저자와 정신과 전문의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설문에 응한 편집자 한 명은 이 책을 ‘일종의 사회현상’이라고 정의했다. 독립출판물 ‘출신’으로는 드물게 장기간 베스트셀러 자리에 있었다. 그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출판인들은 의사(전문가)의 이야기보다 실제 환자(소비자)의 치료 후기에 더 깊이 독자들이 공감했다는 점을 인상적으로 여겼다. 송상미 더난출판 대표는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가 많은 젊은 세대에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공감을 일으키는 듯하다. 얼핏 보면 정신과 상담 기록의 나열에 불과할 수 있지만, 저자가 전문의와 나눈 대화는 독자에게도 마치 직접 상담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라고 말했다.

페이스북으로 연재하는 동안 매회 화제가 되었던 만화 <며느라기> 역시 수신지 작가가 스스로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낸 경우다. 기혼 여성의 삶을 과장 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간까지의 과정도 참신했다. 이지은 위즈덤하우스 출판4분사 과장은 “부조리한 ‘시월드’를 그 어떤 자극이나 허풍 없이 적확하게 그려낸 만화다. 그 어떤 마케팅 없이 소셜 네트워크만으로 입소문을 타 신드롬을 일으킨 과정이 흥미로웠다”라고 밝혔다.


‘몸으로 쓴 기록’의 정점을 찍은 책은 <고기로 태어나서>다. 식용 동물농장 열 곳에서 일한 작가의 경험을 담은 이 책을 누군가는 ‘한국 논픽션의 성취’로 인정했다. ‘주장은 없되 읽는 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자각하게 한다’ ‘국내 고기 산업에 관한 충격적인 르포르타주이자 선혈이 낭자한 밑바닥 노동에 관한 서글픈 비망록이다’ ‘너무 잔혹한데 읽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같은 편집자들의 반응도 이어졌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장애인 변호사가 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지은 위즈덤하우스 출판4분사 과장은 “몸으로 써내려간 경험자의 말은 언제나 힘이 세다고 느꼈다.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모두가 공존하는 삶을 위해서는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은 순위권 안에 든 유일한 문학이다. 김금희는 이 장편소설로 한국 문단의 최전선에 섰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역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으며 “한 세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소설의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피부로 느끼게 한 작품이다. 주인공 경애와 상수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픔과 부서진 마음을 바느질 자국이 느껴지지 않는 능숙한 솜씨로 감각적인 문장을 통해 깊게 표현했다”라고 말했다.

넓은 독자층을 거느린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와 혐오 표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같은 인문 교양서도 편집자들의 고른 추천을 받았다. 퇴사 이후 인생이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개인의 경험을 콘텐츠화’하는 최신의 경향을 보여준다. 한 편집자는 “제목 하나로 이 시대의 우리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 통쾌했다. ‘퇴사’라든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같은 키워드를 앞세운 에세이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열심’이라는 감정을 건드린 에세이는 하완 작가가 처음이다”라고 전했다.

독자 없는 시대, 출판사의 길 ‘페미니즘’

번역서에서는 페미니즘 열풍이 올해도 이어졌다. 누군가는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두고 ‘독자 없는 시대, 출판사의 길’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통상 ‘행복한 책꽂이’를 위해 출판인들에게 설문을 하는 시점은 11월 말~12월 초여서, 12월에 출간된 책은 주목받기 어렵다. 올해 초 장정일 소설가가 <시사IN> 지면을 통해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를 다루며, 하필이면 12월 초에 발행되는 바람에, 언론사들이 꼽는 2017년 ‘올해의 책’ 물망에 아예 오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18년 올해의 책은, 2017년 12월에 출간된 이 책을 심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하지만 출판사 관계자들은 <백래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많이’ 추천했다. 설문 시기를 고려해 지난해 말 출간된 <백래시>는 번역서 분야 ‘2018년 올해의 책’으로 이름을 올렸다.

‘백래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의미한다.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한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는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 시절, 페미니즘과 여성을 상대로 한 전방위적 공격의 기운을 감지하고, 이 같은 현상에 ‘백래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페미니즘 관련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백래시는 2018년 한국 사회에 상륙한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출판인들은 ‘20년 넘게 이어진 미국의 전방위적 ‘반격’의 사례들에 기시감이 든다’ ‘정당한 방어에 대해 영문도 모르고 당하던 여성들에게 ‘백래시’라는 단어를 쥐여준 책이다’ ‘이 시대의 한계와 질문이 무언지 현대의 고전에서 공부를 하자’와 같은 추천 사유를 남겼다.


<헝거> 역시 페미니즘의 흐름을 잇는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인 록산 게이가 어린 시절 겪은 폭력에 대해 고백한다. 그런 일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몸을 불렸지만 이번엔 경멸과 혐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과 방황을 겪었는지 솔직하게 써내려간 자전 에세이다.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쉽지 않다. ‘눈으로, 손으로, 몸으로 겨우겨우 읽어나갔다’는 설문 속 응답이 눈에 띄었다. 또 다른 출판인은 “결국 나를 구원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선언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유효하다”라고 밝혔다.

올해 출간된 국내서 중 우울증과 관련해 개인의 경험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책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였다. 번역서 중에서 우울증을 다룬 것은 <우울할 땐 뇌과학>이다. 뇌과학과 신경생물학이 우울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힌트를 주는 책이다. 과학도 과학이지만 우울증에 대해 높아진 관심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설문에 응한 한 출판인은 “과학서이지만, 우울증에 관한 얘기를 시작한 첫 책이라 주목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유명 저자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책도 있었다. 유발 하라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올해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에 이어 인류 3부작의 완결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냈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가 각각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책은 현재를 다루고 있다. 백지선 흐름출판 주간은 “소소한 책 속에서도 유발 하라리 3부작이 모두 대히트한 것은 거대 담론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은데 그에 부응하는 저자, 대작이 그동안 독자에게 발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세계적인 영장류학자가 인간의 도덕에 대해 탐구한 책 <도덕의 기원>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유인원과 인간 아동의 비교 실험을 통해 어떻게 초기 인류가 협동적으로 바뀌고 도덕적인 종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번역서 목록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다. 2년 전 산문집 <불안의 책>이 소개된 이후 그의 책이 하나둘씩 출간되는 추세다. 생전 시·소설·평론·희곡 등 다양한 글을 썼고 20세기 유럽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한 편집자는 “소소한 ‘페르난두 페소아’ 열풍을 확인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피터슨 열풍’을 일으킨 전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의 자기계발서 <12가지 인생의 법칙>도 목록에 올랐다. 한 편집자는 “페미니즘 관련서가 장악하고 있는 국내 출판계에 오랜만에 출간된, 선이 굵고 강한 메시지를 담은 남성적인 자기계발서”라고 평가했다. 이 밖에도 올해는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와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Becoming)> 등 이름난 저자들의 선전이 두드러졌다. 

ⓒ시사IN 이명익
번역서에서는 페미니즘 열풍이 올해도 이어졌다. 아래는 ‘3·8 여성의 날 기념
미투 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YWCA 행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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