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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류승룡의 기막힌 사정

2019년 01월 31일(목) 제593호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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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승룡씨는 배우로서 슬럼프와 개인적 불운을 겪으며 내려오는 법을 배웠다. 그는 중년 배우가 어떻게 인생에 쉼표를 찍는지, 어떻게 내면에 귀 기울이며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지 보여주었다.

2015년 겨울 어느 날 난데없이 배우 류승룡씨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여서 이유가 궁금했다. <시사IN>이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과 진행하는 ‘청년 섬 캠프’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함께 가서 청년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도 들어보고 기회가 되면 후원도 하고 싶다며 만남을 청했다.
그의 마음을 붙든 것은 기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한 장의 사진이었다. 전남 진도군 관매도의 한 빈집을 찍은 것인데,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그 집을 청년들이 ‘멍 때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주고 싶다며 소개했다. 부근에 사구 언덕도 있고 캠핑장으로 쓸 만한 빈터도 있어서 청년들의 아지트로 탐나는 곳이었다.

그가 연락했을 때는 그의 필모그래피가 막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2012년 <내 아내의 모든 것>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로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었던 그는 2014년 <명량> 이후 이렇다 할 흥행작을 내지 못했다. <손님> <도리화가> <염력> <7년의 밤> 등에서 주연을 했지만 작품성과 흥행성, 어느 쪽에서도 이전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천만 배우’라는 수식어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나중에 그가 그때 왜 그렇게 기자를 애타게 찾았는지 이유를 들었다. 연예인의 박제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은 <난타> 공연을 하며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에너지를 발산시키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전문 매니지먼트를 받으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있으니까 너무 갑갑했다며 대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그와 3년여 동안 한국의 섬과 산 그리고 코카서스(캅카스)의 언덕과 캄차카의 빙하 위를 함께 여행했다.

ⓒ시사IN 조남진
여행을 하면 며칠 동안 주야로 함께 지내기 때문에 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관찰을 하게 된다.
3년 남짓한 기간에 그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중년 배우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에 쉼표를 찍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처음 그를 만난 곳은 중국차를 전문으로 하는 서울 안국동의 한 찻집이었다.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겉모습과 달리 상당히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논의할 주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싱거운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런저런 차를 마셨는데 차 맛에 대한 묘사가 정확했다. 중국인 차 선생이 여러 종류의 차를 시음하게 해주었고 그 차가 구현하려는 맛을 마치 예습이라도 한 듯 콕 짚어냈다.

혀가 민감해진 것은 술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금주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냉면 고명으로 나온 수육 한두 점에 소주를 네 병이나 마시고 있는 자신을 보고 금주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천만 배우’의 압박감을 술로 해소하고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여러 섬의 막걸리, 코카서스의 와인, 캄차카의 보드카 등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술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은 술은 한 병도 없었다. 대신 열심히 차를 마셨고 지금은 전도사가 될 정도로 차 마니아다.

ⓒ시사IN 조남진
세심하게 깎고 정성껏 문질러 만든 목공예품은 주로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류승룡씨가 청년들과 처음 여행을 간 곳은 꼬막섬으로 알려진 전남 보성군의 장도였다.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과 섬 이곳저곳을 답사한 뒤 저녁에는 마을 주민들과 식사를 했다. 그는 섬 캠프에 참여한 청년들은 물론 마을 주민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군중 속에 아무런 이질감 없이 섞여서 마치 그들의 일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일손이 필요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거들었다.

저녁 먹은 뒤 해변에서 함께 캠핑을 했는데 팝업 텐트에서도 불편함 없이 잠을 청했다. 모닥불 피울 나무를 주워 왔는데 이때부터 캠핑 때마다 그의 역할은 나무꾼이었다. 캠핑장에 도착하면 바람처럼 사라져 나무를 한 짐씩 주워 왔다. 나무를 하거나 재료를 다듬는 등 늘 한 명의 일꾼 몫을 했다. 전남 진도군의 관매도에 갔을 때는 청년들과 함께 해양 쓰레기를 치우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예인 특유의 자기중심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무리의 중심이 아니라 늘 주변에 서려고 했다.

오해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법

비결이 있었다. 아니 천성이었다. 그는 초·중·고교 12년 동안 내리 반장을 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챙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심지어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계속 동기회장을 맡았다. 그와 함께 대학 생활을 한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동기 중에는 스타가 많다. 황정민·안재욱·정재영·임원희·장혁진 등 유명 배우와 방송인 신동엽이 동기다. 그들의 경조사가 있을 때 연락을 하는 사람은 그였다.

그런 그를 친한 후배들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해진 뒤 가장 많이 변한 연예인’으로 꼽았다. 일거에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아마 편한 선배여서 우스개로 한 얘기였겠지만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이는 시청자들이 제법 많았다. 지금도 그때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기사에 악플이 달리곤 한다. 대학 은사가 돌아가셨을 때나 어렵게 연극을 하던 선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에도 가장 앞에서 상황을 수습하고 연락하는 사람이 그였지만, 후배들의 어설픈 유머 때문에 그는 초심을 잃은 연예인으로 찍혔다.

ⓒ김성선 제공
류승룡씨(가운데)가 ‘섬청년탐사대’와 관매도 해변의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언젠가 슬쩍 물어본 적이 있다. 유명해진 뒤에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말이 나왔는데 진짜 그랬는지? 맞다고 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유명해지면서 지인들로부터 부탁이 많았다고 했다. 매니지먼트사에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번호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오해를 불렀다.

배우는 이미지가 생명인데 오해를 푸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멋쩍게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고 배우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면 된다며 괜찮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는 그는 딱 오해하기 쉬운 남자였다. 철원 한탄강에 얼음 트레킹을 갔을 때는 근처에 사둔 땅이 있다고 해서 부동산 투자를 했나 오해한 적이 있다. 땅을 산 사연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매형과 누나가 암에 걸렸을 때 요양하면서 살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산 땅이었다. 급히 산 땅은 나중에 집을 짓기 힘든 맹지로 드러났고 매형과 누나도 세상을 떠났다.

류승룡이라는 배우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영화는 2011년 개봉한 <최종병기 활>과 <고지전>이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마흔이 될 때까지 그는 전형적인 무명 배우의 삶을 살았다. 결혼 생활은 옥탑방에서 시작했다. 벌이가 넉넉하지 않아 다른 일도 많이 했다. 언젠가 여름에 낙동강 강가의 아스팔트 공사 현장을 지나는데 자신도 그 일을 해보았다고 했다. 아스팔트는 이렇게 날이 더울 때 깔아야 균질하게 녹아들기 때문에 한여름에 주로 작업한다고 말했다.

ⓒ시사IN 고재열
류승룡씨(가운데)가 한국 관광객들과 코카서스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8년 <염력>과 <7년의 밤>이 개봉할 때 그의 오랜 방황이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한 작품은 흥행으로, 다른 한 작품은 작품성으로 그를 정상궤도에 다시 올려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작품 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올겨울 그는 영화 <극한직업>의 개봉(1월23일)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서비스 오픈(1월25일)을 통해 대중과 다시 만난다. <극한직업> 언론 시사회를 하루 앞두고 공방에서 나무를 다듬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 그를 만났다.

창살 없는 감옥을 나올 때의 감동

먼저 <염력>과 <7년의 밤>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았다. 그는 “잘되었어야 하는 작품인데 많이 아쉬웠다. 심리적 마지노선이 한 번 더 꺾이는 느낌이었다. 연기를 해서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행복하지 않은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의 지점까지 갔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오히려 덕분에 내적인 단단함과 여유가 더 생겼다”라고 회고했다.

예능 프로그램 때문에 이미지가 실추되었을 때 적극 해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이렇게 설명했다. “누명, 오해, 억울함이 인간관계에서 제일 힘든 것이다. 하지만 애써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정말 안 했으면 묵묵히 있는 것도 방법일 때가 있다. 도가 지나치게 두들겨 맞으면 너무했나 싶은 마음에 동정을 하기도 한다. 분노가 지나고 나서는 또 보듬어주게 되어 있다. 그러길 바랐다.”
이미지 실추와 흥행 실패가 이어지던 시기 슬럼프에 대해선 이렇게 토로했다. “준비 없이 너무 급격하게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데도 이유가 없듯이 싫어지는 데에도 이유가 없는 법이다. 팬들 처지에서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괘씸죄가 적용되어서 더 미움이 컸던 것 같다. 그런 시기를 한 번쯤은 거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빨리 깨달아서 그 터널을 지나올 수 있었다.”

슬럼프를 거치는 동안 유난히 주변에 부고가 많았다.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대학 시절부터 정신적 지주였던 김효경 교수가 돌아가셨고 대학로를 지키며 어렵게 연극 운동을 하던 선배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장모와 매형 그리고 누나가 매해 한 분씩 돌아가셨다. 그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장모님과 누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유품을 정리해주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죽음을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없었다.”

배우로서 슬럼프와 개인적인 불운이 겹친 시기를 겪으며 그는 내려오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 기분이었다. 고산에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체온을 보호해줄 다운 패딩도 없고 비상식량도 없는데 고소공포증까지 온 상황이다. 겨우 베이스캠프에 실려 내려와 치료를 받고 다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제 올라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옆으로 트레킹만 하더라도 충분히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을 즐긴다.”

그렇게 이미지 실추를 겪으며 움츠러들려고 할 때 그는 단단한 갑옷 같은 매니지먼트의 틀을 벗어나 대중 속으로 나왔다. 이유는 이랬다. “인기를 얻고 스타가 되면서 점점 고립되었다. 보호받는 삶을 살았지만 갑갑했다. 창살 없는 감옥을 뚫고 나왔을 때 어마어마한 감동을 맛보았다. 조그마한 불편함을 빼고는 얻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계속 보호받는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오는 자유와 비교할 순 없다. 앞으로도 쭉 이런 길을 선택할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담아내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는 데 불편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슬럼프 기간에 그가 붙들었던 것은 세 가지다. 신앙, 여행 그리고 봉사였다. 특히 여행은 그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오히려 그를 치유해주었다.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자유롭고 편해졌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요청해오면 다 사진 찍고 사인해주면서 어울린다. 그런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순간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여럿이 함께 여행을 갔는데 하루를 같이 보낸 뒤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일행 한 명이 말했다. “배우 류승룡씨와 이름도 같은데 닮기도 참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한 말일 수 있지만 그는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간혹 불편한 상황일 때도 있지만, 연예인 아닌 사람도 다 겪는 일이다. 비를 맞기 싫으면 나오지 않으면 된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좋은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길에서 스스로를 치유하고 길에서 만난 인연을 스승으로 삼으며 길에서 만든 인연을 이어나갔다. 길을 안내해준 길동무들에게는 봉사와 후원으로 화답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희생자를 지원하는 단체인 ‘호아빈의 리본’을 후원하고 제주올레를 걸으며 제주올레재단과 인연을 맺은 뒤 올레여행자센터를 건립할 때 후원금을 기탁했다. 매년 아프리카 봉사도 빠뜨리지 않고 가고 있다. “올해도 4월에 3주 동안 아프리카에 간다. 아프리카를 여행으로 가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가 가는 봉사 지역은 보통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대자연도 없고 사파리를 할 맹수도 없다. 정말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온다.”

다시 관매도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싶다

그가 요즘 섬기는 스승은 목공 선생님이다. 그가 목공을 하려고 찾아가는 공방은 경기도 용인시의 집에서 차로 두 시간여 걸리는 곳이다. 보통의 공방과 달리 목재를 직접 수입하는 곳이어서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재료로 쓰거나 거의 모든 형태의 가구를 만들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5~6시간씩 파묻혀 ‘샌딩’ 작업과 ‘오일’ 작업을 한다. “시작은 조그만 나무 다하(차를 담는 그릇)였다. 돌아가신 매형이 만들어준 것이 있었는데 그만 잃어버렸다.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공방을 알아보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나무와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일이 시사회라 집에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텐데 여기서 나무를 다듬고 있으면 모든 근심을 잊고 집중할 수 있다.”

<극한직업> 시사회를 앞두고 있었지만 나무를 다듬는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어떤 영화가 잘되었을 때 그것을 전부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것만큼, 어떤 영화가 잘 안되었을 때 그것을 전부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오버’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되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영화 개봉을 하고 나서 그는 관매도의 외딴 집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 꿈 얘기를 나눴던 청년들과 다시 관매도에 가보고 싶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들이 꿈을 이뤘는지, 지금은 어떤 꿈을 꾸는지 들어보고 싶다. 여전히 그 집이 빈집으로 남아 있다면 그들과 함께 상상력을 발휘해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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