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Ravi)가 처음 대중을 만난 건 소속 그룹 빅스(VIXX)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당시 빅스는 좀비, 저주, 이중인격 등 연이어 극단적인 콘셉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라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뛰어나와 랩을 하곤 했다. 음산하고 야비하며 조금은 불량한 듯한 목소리로.
단단하면서 공격성을 잘 표현하는 외모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는 빅스가 펼치던 어둡고 섬뜩한 세계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빅스라는 작품 속 ‘성격 배우’ 같은 것이었다.
잘 맞는 캐릭터를 찾은 배우는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자기 안에서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라비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팀 동료 레오와의 듀오 유닛인 ‘빅스 LR’에도 참여하고, 솔로 힙합 아티스트로서도 의욕적으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쇼 미 더 머니〉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작사, 작곡 목록도 점점 늘어나더니 후배 아이돌 그룹들의 음반에 ‘입봉’하기도 했다. 활동 반경이 제법 넓고 작품 수가 많은 것에 비해서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썩 요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 앞서 힙합과 아이돌 사이의 가교를 마련한 사람들로 지드래곤(빅뱅)이나 지코(블락비) 등이 있다. 라비는 이들처럼 무대 위에서 ‘미쳐 있는’ 듯한 ‘천재’의 아우라를 그다지 많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솔로 작업으로 여러 차례 믹스테이프를 발표하고, 빅스에서는 힙합보다 댄스팝에 가까운 작업을 한다. 그는 마치 성실한 직공처럼 보인다. 팀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조금씩 흘려넣되, 팀과 회사의 틀을 쥐고 흔들 만큼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아이돌이라는 본분에 충실한 것인지 모른다.
이 직공은 솔로 작업에서 좀 더 분방하다. 힙합 아티스트로서 ‘인정’받는 것은 아이돌에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숙제 같지만, 그는 (이제) 거기서도 태연한 듯 보인다. 갈고닦은 정규 음반을 보란 듯이 내놓기보다는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믹스테이프를 낸다. 갑자기 꽤 팝적인 곡들을 내놓는가 하면, 트랩 비트로 한 장을 밀도 있게 채워버리기도 한다. 사실 디지털 스트리밍 시대에 믹스테이프란 종종 ‘이름만 믹스테이프’이기도 하다. 라비는 이를 잘 이용한다. 결과물을 내놓는 ‘과정’에 힘을 주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듣는 이도 발표하는 이도 부담 없이 즐기면 된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피땀은 들일 만큼 들였으니 말이다.
그의 솔로 작업에 ‘만끽’이라는 키워드가 어울리는 것은 그래서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겠다는 기세는 실제로 트랙마다 흥건히 배어 있다. 아이돌과 솔로 아티스트, 프로듀서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플랫폼 위에 그는 그때그때 자신의 몸을 맞추며 서서히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몸은 성실하게, 마음은 느긋하게. 나는 그런 것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현재를 즐기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간혹 ‘왜 사람들이 라비에게 주목하지 않지?’라는 의문이 들다가도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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