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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 성폭력이 12년째 반복되는 이유

2019년 01월 29일(화) 제593호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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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석희 선수의 ‘미투’ 이후 문체부가 내놓은 대책은 11년 전과 판박이다. 11년간 그 대책은 대책이 되지 못했다. 성폭력을 당한 선수는 침묵해야 했고, ‘영구제명’된 가해자들은 속속 복권됐다.

조재범 전 코치가 심석희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를 상습 성폭행했다는 의혹을 SBS가 보도했다. 이튿날인 1월9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체육계 성폭력 비위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영구제명 대상 성폭력 범위를 확대한다. 성폭력 지원 전담팀을 구성해 피해자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도자와 선수에게 연 2회 이상 인권 교육을 지원한다.’

11년 전인 2008년 2월18일 당시 문화관광부·교육인적자원부·대한체육회가 ‘스포츠 성폭력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KBS <시사기획 쌈> 보도로 스포츠계 성폭력이 사회문제가 된 직후였다.

‘성폭력 가해자는 영구제명한다. 성폭력 신고센터를 설치해 원스톱 처리 체계를 마련한다. 지도자와 선수에게 연 1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의무화한다.’ 범위나 기관, 횟수를 제외하면 2019년의 대책과 판박이다. 그러니까 정부가 무방비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이 대목이다. 11년에 걸친 대책은 어째서 그토록 허무하게 뚫렸나? 징계와 신고, 교육은 왜 성폭력을 막지 못했나?
ⓒ연합뉴스
지금껏 스포츠계에서 산발적 ‘미(me)’들이 있었지만 ‘투(too)’로 넘어가지 못하고 ‘쉼표’가 길었던 것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면죄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이름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다. 인권위는 입법·사법·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인권 전담 국가기관이다. 인권위는 2008년 스포츠 분야 인권 사업에 주력했다. 정부와 체육계에 성폭력 근절을 권고하는 것을 넘어 직접 제보를 받았다. 학생선수·학부모·지도자에게 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전국 중·고교 남녀 학생선수 1139명을 대상으로 인권 상황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학생의 78.8%가 폭력을, 63.8%가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나타났다. 언어 성희롱이 58.5%로 가장 높았고, 강제 추행이 25.4%로 뒤를 이었다. 강간과 강제적인 성관계 요구도 각각 1%(11명), 1.5%(17명)였다.

실태조사를 통해 인권위는 공부할 권리, 곧 학습권 침해가 폭력·성폭력과 연결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습권을 보장받지 못하니 운동 외의 대안을 선택하기 힘들고, 인권침해에 저항하기도 어렵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인권위는 학생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인권침해를 예방하며, 피해자를 지원하는 ‘학생선수 인권정책 종합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여기에는 피해자 원스톱 지원, 합숙소 개선, 지도자 인사검증 시스템 등 지금 논란이 되는 문제의 개선책이 대부분 들어 있었다.

ⓒ연합뉴스
심석희 등 선수들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
“입시 제도와 국가 체육정책을 포함해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려 했다. 전문가뿐 아니라 대학 총장 등 이해 당사자가 수차례 논의했다. 그게 2009년 상반기까지다.” 당시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인권위 내에서 스포츠 인권을 맡았던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8년 2월4일 인권위 상임위원에 임명된 문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를 계속 문제 삼으니 다른 기관도 인권위 말을 안 들었다. 대한체육회도 처음 문제가 터졌을 때는 인권위와 ‘스포츠 분야 인권 향상을 위한 공동협약’(2008년 3월)을 체결했는데, 점점 인권위와 대면도 안 하려 하고 독자적으로 대책을 만들겠다고 했다. 2009년 중반 안경환 위원장이 돌연 사퇴하면서 상황이 더 힘들어졌고, 관심 있던 직원들도 떨어져나가면서 ‘스포츠 인권’이 인권위 내에서 힘을 잃어갔다”라고 말했다. 2010년 11월 문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를 고사 단계로 전락시키고 있다며 항의의 뜻으로 유남영 당시 상임위원과 동반 사퇴했다.

스포츠 관련 조직, 스포츠 인권에 무심

2011년 7월 인권위는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폭력, 성폭력, 학습권 침해 예방을 위한 정부와 스포츠 관련 기관의 책임을 명시했다. 선수·지도자·학부모가 지켜야 할 행동 기준을 마련했다. 이 중 성폭력 예방 가이드라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도자는 학생선수와 성적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하는 경우 모든 윤리적·법적 책임은 지도자에게 있다”라는 내용을 지도자 행동 규범의 예시로 들었다. 문 이사장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게 끝이 아니다. 널리 전파하고 관계기관과 계속 토론하며 그 의미를 설명해야 실효성 있게 작동한다. 당시 인권위는 그런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2008년 당시 인권위의 문제의식은 이후 인권위 파행으로 공중에 떠버렸다. 대한체육회와 산하 종목 단체, 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문체부는 그동안 징계를 강화하고, 신고센터를 열고, 교육도 했지만 당시의 문제의식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문 이사장은 그로부터 11년에 걸친 스포츠계 인권 대책에 대해 “시늉만 했다. 대한체육회도, 문체부도, 교육부도 사실상 손 놓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사건이 터지면 거론되는 영구제명은 상징적이다. 2007년 우리은행 여자농구팀 박명수 감독이 소속 팀 선수를 성추행해 유죄를 선고받은 당일, 한국여자농구연맹은 박 감독을 영구제명했다. 그러니까 원래도 할 수 있는데 안 했던 것이다. 2008년 ‘성폭력 가해자 영구제명’을 천명한 뒤 대한체육회는 성폭력 3회 적발 시 영구제명이던 것을 2010년부터 1차 적발 시 영구제명으로 바꿨다.

ⓒ연합뉴스
2008년 3월14일 ‘스포츠 분야 인권 향상을 위한 협약’에 서명한 김정길 당시 대한체육회장(오른쪽)과 안경환 당시 인권위원장.
ⓒ시사IN 윤무영
1월15일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태에 대한 쇄신안을 발표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큰 의미 없는 조치였다. 대한수영연맹은 2013년 3월 제주에서 열린 전국수영대회 때 여자 탈의실에서 몰래카메라를 찍다가 적발된 고등학교 수구 선수 3명을 영구제명했지만, 몇 달 뒤 선수 자격을 회복시켰다. 대한역도연맹은 2013년 8월 오승우 역도 국가대표팀 총감독의 선수 성추행 의혹을 자체 조사한 뒤 영구제명했다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재심에서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2014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의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대한빙상경기연맹은 해당 코치를 태릉선수촌에서 내보냈을 뿐 영구제명은 하지 않았다. 빙상연맹은 ‘당사자인 선수와 지도자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해 더 이상의 조사가 무의미하다’고 결론 낸 것으로 알려졌다. ‘성폭력 가해자는 영구제명한다’는 대책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시점이다. 해당 코치는 이후 불거진 스포츠 도박 문제로 영구제명되었다가 그마저 3개월 자격정지로 감경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게 조재범 전 코치다.

지금도 대한체육회 공정위원회 양형 기준에 ‘강간, 유사강간 및 이에 준하는 성폭력’은 영구제명이라고 되어 있다. 산하 종목 단체 규정에도 이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좀처럼 적용되지 않는다. 신유용 전 유도선수는 고등학교 때 코치에게 상습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난해 3월 경찰에 가해자를 고소하고 지난해 말 SNS를 통해 ‘미투’(나도 말한다)를 했다. 대한유도회는 이를 알았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이번 파문 뒤 신 전 선수가 언론 인터뷰에 나온 뒤에야 가해자로 지목된 이를 영구제명하기로 했다.

대한체육회는 2009년 6월 ‘스포츠人권익센터’(지금의 스포츠인권센터) 홈페이지를 열고 폭력·성폭력 신고를 받았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4년 2월 문체부는 폭력·성폭력 등을 뿌리 뽑겠다며 산하에 ‘스포츠 4대 악 신고센터’(지금의 스포츠비리신고센터)를 열었다.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초등학생 때 자신을 성폭행한 코치를 2016년 테니스 대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그를 강간치상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면서 두 기관에도 피해를 신고했다.

징역 10년 선고받고 나서야 영구제명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는 신고 접수 1년4개월 만에 ‘대한테니스협회가 가해자를 영구제명했다’고 김은희 코치에게 통보해왔다. 문체부 스포츠비리신고센터는 신고 접수 1년8개월 만에 동일한 징계 결과를 알려왔다. 모두 2017년 10월 1심에서 가해자가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뒤 이뤄진 조치다. 문체부 스포츠비리신고센터의 경우 담당자 배정에만 15일이 걸렸다. 김은희 코치는 지난해 8월 국회 토론회에서 이 과정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정보가 없어서 소송에서 진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비슷한 사건을 찾아보고 법 조항도 알아보고 변호사를 구하러 다녔다.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 피해자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지원과 지지자가 필요하다.” 2008년 정부가 ‘스포츠 성폭력 피해자 원스톱 지원’을 천명했지만 8년 뒤인 2016년의 현실은 이랬다.

이경희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팀 코치는 2011년부터 3년간 대한체조협회 간부로부터 성추행과 강간미수 피해를 당했다며 2014년 대한체육회에 제보했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간부는 대한체육회가 조사를 시작한 지 9일 만에 대한체조협회에 사표를 냈다.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대한체육회는 이후 해당 간부가 대한체조협회 부회장에 오르려 했을 때는 인준을 거부했지만, 같은 인물이 한 지역 체조협회장에 올랐을 때는 인준에 동의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간부는 한 지역 체조협회장으로 고등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코치는 지난해 3월 ‘미투’에 나섰지만 아직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 전 코치는 해당 간부를 경찰에 고소했다. 불기소 처분이 나왔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이 전 코치에게 소형차에서 피해 사실을 재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미투’에 나선 이들이 겪는 보편적 어려움에 스포츠계의 폐쇄성이 중첩된 형태다. 이 전 코치를 돕는 함은주 문화연대 집행위원은 “성폭력과 관련해서는 대한체육회나 종목 단체 징계 규정이 있어도 법적 판단이 없는 한 잘 반영되지 않는다. 물론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도대체 어디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2011년 인권위가 제정한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관련 스포츠 조직이나 기관은 피해자 보호와 지원, 공정한 사건 처리, 가해자에 대한 징계 등 조치의 이행, 법적 처리 의뢰, 예방교육 강화 등에 대한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나 산하 종목 단체는 많은 경우 법적 판단(그나마도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했다)을 기다리며 손을 놓았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면죄부를 주었다. 최동호 스포츠문화연구소장(스포츠 평론가)은 “제도가 없어서 성폭력이 반복됐나? 제도도 사람이 운영한다. 있는 제도만 제대로 운영했더라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질적 성폭력 뿌리 뽑을 마지막 기회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대한체육회나 산하 종목 단체들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떻게 조용히 수습할까만 궁리했다. 최고 징계가 영구제명인데 그중에서도 복권하고 1, 2년 뒤 현역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선수 처지에선 얘기해도 소용없다고 느끼고 침묵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스포츠계 안에서 산발적 ‘미(me)’들이 있었지만 ‘투(too)’로 넘어가지 못하고 ‘쉼표’가 길었던 배경이고, 10년 넘게 같은 대책이 반복되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결국 대한체육회 등 스포츠 조직은 ‘겉으로는 강화되는 제도’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가해자는 용서받고 피해자는 고립된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한체육회가 밝히듯 “지난해 국가대표 선수 87.8%, 일반 등록선수 82.9%가 스포츠 인권 교육을 받았다”거나 “지난 한 해 동안 학교운동부와 회원 종목 단체 등 소속 4만4436명을 대상으로 스포츠 인권 교육을 실시”했다고 해도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대한체육회는 심석희 선수의 폭로가 보도된 1월8일 “스포츠계 현장의 (성)폭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라는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처음으로 국가대표 전수조사까지 벌였지만 이 조사에서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용철 교수는 “내가 만난 한 스포츠 성폭력 피해자는 미투 이후 2차 가해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있다. ‘기억이 지워지는 약을 달라’고도 호소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서는 건 제2, 제3의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만약 대통령 방문 때 심석희 선수가 선수촌을 이탈하지 않았다면 폭행 사건조차 묻혔을 거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정도의 사회적 파장을 우리가 또 놓친다면, 앞으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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