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우, 후렘, 스리팅, 밀링, 알곤용접…. 간판마다 낯선 단어가 많았다. 휴대전화로 검색을 해보고서야 기계를 만드는 각 공정에서 쓰는 전문용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청계천에서는 탱크와 인공위성도 만든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1960년대부터 형성된 서울 청계천 공구거리에 자리를 잡은 공장과 상가만 5만여 개. 어느 집은 일평생 간판 ‘후렘(프레임)’만 짜고, 또 어느 집은 ‘밀링(절삭가공)’만 60년을 했다. 너비 2m 정도의 좁은 골목길마다 철근을 자르는 날카로운 기계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자 소음은 굴착기가 내는 소리로 바뀌었다. 1월10일 청계천과 을지로의 공구거리, 그중에서도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3-1, 3-4, 3-5 구역에서 야간 철거가 진행 중이었다. 현재 88개 동 중 30개 동이 철거된 상태다. 내려진 셔터마다 ‘재개발 때문에 이전을 하였습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혹시 헛걸음을 한 고객이 있을까 봐 매장 위치와 ‘전화를 주면 모시러 오겠다’는 손 글씨도 함께 남겼다.

ⓒ시사IN 이명익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에 있는 ‘영진사’의 김남술씨(왼쪽)가 마지막 남은 공기압축기를 포장하고 있다.
김남술씨(72)가 사흘째 하던 이사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1월 둘째 주까지 가게를 비워야 했던 터라 그는 마지막 남은 공기압축기 몇 대를 포장하고 있었다. 공업용 에어 컴프레서를 제작하는 영진사를 45년간 운영해왔다. 궁서체 붓글씨로 쓰인 양철 간판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원래 공구상 직원이었는데 공기압축기 기술을 배워서 공장을 차렸어요. 여기가 평생 우리 가족들 먹여 살린 데지.”

그는 인근 공장으로 물건을 잠시 옮겨둘 작정이다. 공장 역시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 포함돼 있었지만 이번에 철거가 진행되는 지역은 아니었다. 임시방편일 뿐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기술 장인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기 때문에 여태껏 한 거지,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제조업 생태계의 핵심 부수고 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4·5 구역의 철거 작업이 시작된 건 지난해 10월 말부터다. 3구역은 밀링·선반(절삭) 등 금속가공을 하는 정밀기계 공장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현재 이 구역에 있던 공구상가와 공장 400여 개가 문을 닫았다. 두 달간 업체 수백 개가 한꺼번에 퇴거하다 보니 대체 부지를 찾기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대부분 “여기가 아니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라며 폐업을 선택했다. 청계천만의 특수한 작업 방식 때문이다. 청계천 공구거리의 상인들은 이곳을 두고 “혼자서는 못 사는 곳” “하나의 유기체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기계의 작은 부품 하나 ‘협업’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구조다. 이를테면, 모터 하나를 만들더라도 가공, 용접, 연마, 칠 등 여러 단계의 공정이 필요하다. 골목 안의 각 공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며 청계천만의 산업 생태계를 만든다.

ⓒ시사IN 이명익서울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청년 메이커(스타트업 제조업자)들이 모여 있는 세운상가 3층.
서울 중구청도 문화유산으로서 이 골목의 가치를 잘 안다. 2016년 4월부터 이 일대를 ‘을지유람길’로 지정해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30년째 청계천에서 주물을 만들어온 신아주물의 김학률 사장(61)은 “도면도 없이 말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거죠. 어쩔 땐 말없이 갖다줘도 척 하고 알아들어요. ‘이거 신아주물에서 왔네?’ 하고…”라고 말했다.

3-1·4·5 구역의 재개발이 진행되자 전체 생태계가 흔들거렸다. 3-2 구역에 있는 신아주물은 이번 철거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발맞춰온 거래처들이 사라져 당장 영업이 힘든 상태다. 김학률 사장과 거래한 한 공업사는 폐업을 했고 다른 공업사들은 가깝게는 서울 문래·구로, 멀게는 경기 시흥과 파주 등지로 이전을 했다. “영화 소품부터 붕어빵 틀, 메달, 강단 바닥에 설치하는 마이크 잭 박스까지 모든 분야가 사실 주물에서 나와요. 그런데 이다음 연결고리가 끊어지니 완제품을 못 만들죠.” 끊어진 연결고리를 다시 잇자니 물류비용이 발생하고, 새로운 거래처를 만들자니 도면도 없이 소통하던 방식을 새로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여기는 이가 하나 빠지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구조예요”라고 말했다.

타격을 입은 건 공구거리의 상인들만이 아니다. 3구역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세운상가가 있다. 이곳은 서울시 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2017년 9월 새롭게 탈바꿈했다. 당시 서울시는 세운상가의 장인들이 지닌 기술력과 청년들의 아이디어를 결합해 창조문화산업을 만든다는 비전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청년 메이커(스타트업 제조업자)를 세운상가에 불러 모았다. 예술가와 메이커 중심으로 구성된 업체 17개가 입주했다.

ⓒ시사IN 이명익1월17일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재개발을 멈추라며 행진하고 있다.

3D 프린터를 제조하는 아나츠의 이동엽 대표도 당시 서울시의 초청을 받아 송파구에 있던 사무실을 옮겼다. 그는 청계천 일대가 “제조 스타트업들에겐 최적의 생태계였죠”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이곳에 입주한 지 1년 만에 의료용과 휴대용 3D 프린터를 개발했다. 이 대표는 “휴대용 프린터를 만들어볼까 하는 아이디어만 있었어요. 공구거리에 배터리 장인 분한테 말씀드렸더니 2시간 안에 제품에 맞는 배터리를 만들어주시더라고요.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아예 꿈도 못 꿨을 제품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청계천 공구거리를 뛰어다니며 시제품을 완성했다. “이 동네가 가진 속도감과 기술력, 그에 비해 저렴한 비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프라예요.”

그러나 입주 1년여 만에 청계천 공구상가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거래처였던 3구역의 정밀기계 공장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서 당장 의료용 3D 프린터 생산이 어려워졌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모든 제품을 이곳에서 만들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은 빠른 시간 내에 소량의 시제품을 만드는 게 생명이거든요. 기술 유출을 감수하고라도 중국에다가 주문을 맡겨버릴지 고민 중입니다.”

현재 리모델링이 된 세운상가에는 ‘maker city’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그곳에서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를 바라보면, 낡고 오래된 저층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동엽 대표는 재개발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불과 한 달 전인 지난해 12월에야 알았다. “제일 활발하게 돌아가는 곳은 저 골목 안의 공장들이에요. 재개발 사업이 사실 제조업 생태계의 핵심을 부수고 있는 거죠.”

청계천 일대는 어떻게 ‘재생’과 ‘재개발’이 공존하게 됐을까?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부터 충무로역에 이르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역사는 200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낙후된 청계천·을지로 일대를 전면 재개발하고 녹지공원을 조성하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시작했다. 세운상가를 철거한다는 구상도 이 계획안에 담겨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한 후 2014년 3월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계획안이 변경됐다. 계획안의 핵심은 세운상가를 ‘존치관리구역’으로 남긴다는 것이었다. 도심이 가진 역사와 문화, 산업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서울시 “도시 재생 의미 살리며 재개발”

문제는 박원순 시장이 2015년 세운상가의 재생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세운상가를 제외한 청계천·을지로 일대는 전면 재개발 사업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인허가를 해준 것이다. 지금 철거가 진행 중인 3-1과 3-4·5 구역은 각각 2015년 7월과 12월에 사업시행인가가 났다. 1월15일 서울시 도시재생실의 한 관계자는 〈시사IN〉과의 전화통화에서 “사업 인가권은 관할 구청이 가지고 있다. 사업자가 법적 절차에 따라 시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상 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관할 구청인 서울 중구청 도심재생과의 한 관계자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서울시가 수립하고 서울시가 결정한 사안이다. 계획 범위 내에서 실행에 옮기는 게 구청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서울시의 ‘세운상가일대 도시재생 활성화계획(2017)’에 도시 재생의 방향성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도심의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고, 무분별한 철거를 지양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도시재생실의 관계자는 “청계천 일대가 노후화해 도시 재생만으로는 기반 시설을 재정비하기 쉽지 않다. 대신 도시 재생의 의미를 살리도록 옛길을 보존하고, 사업자가 기존 상인들이 입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때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사업계획안에 담은 바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철거가 진행되는 구역 외에도 사업시행인가가 난 지역이 있다. 청계상가 인근의 3-2·6·7 구역, 세운상가 오른쪽의 4구역, 충무로 진양상가 인근의 6-4-21 구역이다. 이곳에는 2023년 5000여 가구, 1만명이 거주하는 주상복합촌이 들어설 예정이다. 도시를 기록하는 예술가 및 연구가 단체인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씨(연세대 도시공학과 박사과정 연구원)는 “서울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시장과 제조업 거리를 ‘주상복합 아파트’ 건물로 허가해준다는 사실 자체가 도시 재생의 취지에 반한다. 도시 재생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긴 어렵지만 중요한 건 전면 철거를 하지 않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재개발이 진행되면 평양냉면집 을지면옥, 양 대창집 양미옥, 미래 유산으로 지정된 노가리골목 등이 철거될 예정이었다. 이런 문제점이 보도되며 논란이 일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1월16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재검토 의사를 밝혔다. 박 시장은 “공구상가 장인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고 전면적으로 (현 상황을) 재검토해 새로운 대안을 발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동대문 중심 의류상가, 종로 주얼리, 중구 인쇄업, 공구·조명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서울 도심에 집중 산업 근거지들이 있는데 이걸 없애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도심에서 그런 산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조만간 구체적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라고 덧붙였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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