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 뼈가 필요했습니다. 논문 주제는 고인류였지만 화석을 분석한 결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고인류와 가까운 종인 현생인류·침팬지·고릴라의 뼈를 분석하고 비교해야 했습니다. 남아 있는 부위보다 사라진 부위가 더 많은 화석 자료와 달리, 비교 자료로 쓰이는 골격은 빠진 부위가 없는 개체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제가 있던 미시간 주에서 멀지 않은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에 적합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박물관에는 고릴라·침팬지 골격과 더불어 인골 수천 구가 소장되어 있었고, 개체마다 사망 당시 나이·성별·인종, 그리고 많은 경우 사망 원인까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인골이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모이게 되었을까요? 인골들은 원래 박물관 인근에 있는 케이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의대) 해부학 교실에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케이스웨스턴 대학 의대 하만 교수는 미국 중서부 지역의 사체들을 모았습니다. 당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체는 모두 케이스웨스턴 대학 의대 해부학 교실로 보내졌고, 해부학 실습이 끝난 뒤 장기와 살은 녹이고 뼈만 추려서 해부학 교실에 보관했습니다. 이 작업은 하만 교수의 뒤를 이어서 토드 교수가 담당했습니다. 1950년대에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하만-토드 인골관(Hamann-Todd Human Osteological Collection)’이 탄생했습니다.
 

ⓒThe Cleveland Museum of Natural History 갈무리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 하만-토드 인골관(위)에 소장된 사람 뼈는 의대 해부학 교실에 보관됐던 인골을 1950년대에 옮긴 것이다.

수천 구의 인골이라면 적어도 20세기 초반 당시 그 지역 인구를 대표할 정도로 큰 표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개체씩 꺼내어 머리뼈와 치아, 몸통과 사지 뼈의 다양한 계측치를 쟀습니다. 성차에 의한 편향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성비를 같도록 맞추었습니다. 침팬지나 인간은 성차가 크지 않지만, 고릴라의 경우 암컷과 수컷의 몸집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성비를 맞추지 않으면 편향된 결과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침팬지와 고릴라에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인골이 소장되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성비를 맞추어 어른의 인골을 골라서 여러 값을 쟀습니다. 흑인 남자 인골이 가장 튼튼했습니다. 뼈도 강건했고 치아도 거의 모두 남아 있었으며 치아의 건강 상태도 양호했습니다. 그 외 나머지 인골은 치아가 모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치아가 모두 남아 있는 여자 인골은 특히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수돗물에 불소를 넣지 않았기 때문에 치아의 상태가 매우 나빴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수돗물에 불소 처리를 하기 전 사람들의 치아 건강 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뼈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20세기 초반에 흑인이 건강했다?

결국 치아가 모두 남아 있는 여자 인골의 수에 맞추어 남자 인골을 골라 쟀습니다. 남자 인골의 상태는 가지각색이었지만 여자 인골보다 뼈와 치아의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치아도 빠지고 뼈도 약한 경우는 나이가 많은 인골이었습니다. 여자 인골은 나이와 상관없이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온 신경을 썼기 때문에 온전한 개체를 찾기만 했습니다. ‘백인’으로 기록된 인골보다 ‘흑인’으로 기록된 남자 인골의 건강 상태가 좋았는데, 20세기 초반에 흑인이 백인보다 더 건강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지만, 그냥 넘어갔습니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당시에는 박사 논문을 써서 졸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 문제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모으고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고 교수가 되고 그다음에야 큰 그림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인골관에 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AP Photo미국 한 대학병원의 해부학 실험실에서 학생들이 시체를 해부하고 있다.

박물관에 소장된 인골이 20세기 초 해부학 교실에서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듯 ‘과학을 위해 기증’된 몸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뒤 자신의 몸을 기증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가 마련된 것은 미국에서 20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의대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고 예로부터 인체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그러나 해부를 통해 몸의 생김새를 속속들이 알려고 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중세 시대까지는 내과의가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몸을 직접 만지는 일은 천시되었고, 더구나 죽은 몸을 만지면서 자르는 해부는 사회적으로 금기였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눈에 보이는 과학적 접근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몸을 직접 만지고 수술을 통해 몸을 잘라서 들여다봐야 하는 외과의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의사라는 직종이 사회계층의 상층부에 놓이는 한편 중산층이 늘어나며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 수가 늘어나고 의대 수도 증가했습니다.

늘어난 의대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해부해야 할 인체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습니다. 인체를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검에 칼을 대는 것은 끔찍한 일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양에서도 죽은 이의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내어 시체를 조각내는 부관참시는 극형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부관참시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부관참시가 노리는 효과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는 죄인의 주검이 해부되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범죄 예방을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한편 해부학 실습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거양득의 효과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18세기 말까지도 해부를 합법적인 형벌로 선고했습니다.

해부 형벌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해부학 실습용 인체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19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해부학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감옥이나 병원에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체는 각 주의 해부학 이사회에 맡겨지고 이사회는 임자 없는 사체를 의대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보냈습니다. 해부학 법률의 대상은 확대되어 범죄자와 병자뿐 아니라 빈민구호소에서 죽은 사람들까지 해당했습니다. 범죄 예방, 빈곤 예방 효과와 더불어 해부학 실습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나쁜 짓 하면 해부된다!”뿐만 아니라 “(게을러서) 가난하면 해부된다!”라고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해부학 법률을 만들어서 연고가 없는 사체를 가져왔지만 그래도 의대 해부학 실습에 필요한 사체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에는 우후죽순으로 의대가 신설되었습니다. 의대에서 행해지는 해부학 실습과 관련하여 사회는 의사 교육의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사체 해부라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가 섞인 눈길을 보냈습니다. 급증하는 사체 수요를 수익원으로 삼아 등장한 ‘사체 도둑’들은 장례회사에서 직접 시신을 가져오거나, 공동묘지에 가서 땅속에 묻힌 관을 뜯고 사체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해부학 교실에서 해부된 사체들은 얼마 전까지 노예였던 흑인과 빈민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사체를 기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체는 본인이나 가족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해부되었습니다.

그러면 해부가 끝난 그 많은 사체는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하만 교수와 토드 교수의 이야기처럼 사체를 모아서 인골관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박물관에 속한 인골관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조각내어져 뒷골목에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0세기 초에 가끔 신문 기사에서 다룬, 뒷골목에서 발견된 시체 조각은 아마도 해부학 교실에서 슬쩍 가져다놓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해부학 실습이 끝난 사체는 다시 묻히기도 했습니다. 텍사스의 프리드먼 공동묘지는 노예 신분을 벗고 자유민이 된 사람들의 묘지입니다. 인류학자 제임스 데이비슨은 프리드먼 묘지를 발굴한 결과 많은 관이 깨지고 비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두 개체가 관 하나에 겹쳐진 상태로 묻혀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겹쳐놓은 자세로 보아 정성을 들였다기보다는 빈 곳에 맞추어 억지로 넣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1990년대에 저는 미시간 대학 의대에서 해부학 실습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속한 실습 조에서 해부했던 사체는 한쪽 다리가 잘린 남자 노인이었습니다. 피부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해부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과 대조해서 이름을 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실습이 끝나고 어떻게 되었을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1980년대 석촌동 발굴에 학생으로 참여했을 당시 무덤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발굴단은 소주 한 병을 놓고 간단히 절을 올린 다음 옮겨 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인골이 나오면 장갑을 끼고 수습한 다음 분석에 들어갑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 조상님’의 주검이라는 생각으로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형질 인류학(생물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인골관에 소장된 인골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 자료로서의 가치에 대해 별도의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충분히 많은 수의 인골이므로 통계학적으로 튼튼한 집단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현생인류를 대표하는 데이터라기보다는 현생인류의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데이터입니다. 인골관에 소장된 인골들의 주인은 현생인류를 대표하는 데이터로 선택되려고 자발적으로 기증에 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이제 미국 인류학계에서는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를 드러내고 직시함으로써 자성과 치유의 첫걸음을 내딛자는 움직임이 작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골관의 인골은 통계분석이 가능한 표본이라는 보편성과 동시에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교육하는 일 또한 그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 일본의 〈아사히신문〉에는 고등학교 실습실에 놓인 머리뼈가 모형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인골이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머리뼈는 ‘쇼와 10년대’ 혹은 ‘메이지 시대’에 입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해부의 용도로 쓰인 사람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있었듯이 일본에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몸이 해부학 교실에 남아 있게 되었을까요? 쇼와 10년대에 일본에서 존중받지 못하던 사람들은 혹시 한국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기자명 이상희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 인류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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