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룽바오에 담긴 중산층의 꿈

홍세화(36·린궁즈멘관 사장)

 

ⓒ시사IN 신선영1월17일 아침 홍세화씨가 둘째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있다.

대림동에 사는 내국인 주민들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식당이 있다. 얼마 전 유명 맛집 소개 프로그램 제작진이 벌써 이곳을 촬영해 갔을 정도다. 중국식 칼국수와 샤오룽바오(小籠包)를 취급하는 ‘린궁즈멘관(임공자면관)’이다. 가게 주인 홍세화 사장은 ‘대장부’다. 호탕하고 유쾌하다. 지린시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신길동 신풍시장에 조그맣게 좌판을 열어 장사를 시작한 것이 점점 규모가 커졌다.

“딴 건 몰라도 내가 손맛 하나는 진짜 자신 있거든요.” 지금은 대림중앙시장에만 가게를 세 개나 가진 ‘3세대 중산층’이다. 홍씨에게 대림동은 베이스캠프다. 이제는 대림동에 안착했으니, 다음 목표를 세우고 있다. 최근 서울 신정동의 식당 자리를 인수했다. 중국 출신이 없는 동네에서 진짜 토종 한국인의 입맛을 공략해보고 싶어서다. “일종의 도전이죠.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봐야지 언제 해보겠어요.”

그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면 한국인과 부딪치고 섞이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믿는다. 홍씨의 자녀도 신길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중국 출신이 한 반에 많아야 3~4명이다. 대림2동으로 집을 옮겨 중국 출신 학생이 많은 대동초등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가 크면서 같이 살아야 하는 이들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자기가 자라면서 돌파해야지.” 홍씨가 신정동 사람들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가게 이름은 일찌감치 ‘린궁즈’로 정했다. 작은 가게를 의미하는 ‘면관’이라는 단어를 뺐다. 좀 더 크고 번듯한 가게를 일궈보겠다는 다짐이다.

 

ⓒ시사IN 신선영량피(凉皮:중국식 비빔면 요리) 좌판에서 시작한 홍씨의 사업은 대림동 식당 세 곳으로 확대됐다.

 

 

 

 

 

 

바른생활 사내 혹은 국경 없는 사내

이현(28)

 

 

 

ⓒ시사IN 신선영지난해 12월30일 연말휴가를 얻어 서울살이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서울 구경에 나선 이현씨가 대림역 8번 출구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동포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이현씨는 ‘바른생활 사나이’다. 정해진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씨는 충남 아산에 위치한 회사에서 일한다. 회사 인근 기숙사에 거주하지만 주말이면 가족과 친척을 만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 상경한다. 아산 외곽 지역에 있는 회사에서 버스를 타고 1호선 온양온천역으로, 이곳에서 다시 신도림을 거쳐 대림동까지. 버스를 기다리고 환승하는 데에만 편도로 총 4시간이 걸리는 여정이다.

이씨의 고향은 중국 상하이다. 부모는 한국인이 상하이에 세운 회사에서 일했다. 이씨가 20대가 되면서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부모는 한국인 사업가를 따라 미얀마로, 친척들은 서울 대림동과 대구에 터전을 잡고 함께 살았다. 그는 중국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새로운 일과 언어를 배우려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나마 나머지 가족인 누나, 조카와 친척들이 모두 한국에 있으니까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디에서 살 것인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뿌리를 내릴지 정하지 않았다. 다만 국경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살고 싶다. 한국어도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 더디더라도 진득이 공부하는 게 목표다.

ⓒ시사IN 신선영1월18일 이씨가 대림동 친척 집에서 미얀마에 있는 어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는 모습.
 

 

 

 

 

“애국가 4절을 자꾸 까먹는 거라”

김광용(43, 애민·루이국수 사장)

 

 

 

ⓒ시사IN 신선영귀화한 김광용씨 가족은 대림동에 3대가 모여 살고 있다.
대동초등학교를 다니며 태권도를 배우는 아들은 김씨의 자랑거리다.

대림중앙시장에서 식당 ‘애민’과 ‘루이국수’를 운영하는 김광용 사장은 묘한 억양을 구사한다. 부산에서 오래 생활한 까닭에 부산 방언과 경북 방언, 중국 동북지역 방언이 뒤섞였다. “첨 왔을 때 암꾸도 없으니께네 한국인 형님이랑 계속 노가다를 뛰었거든. 내 감천항 방파제를 지었는데 얼마 전에 태풍 땜에 쓸려붓더라고. 하, 마음이 참 그렇데.”

경북 포항에 살던 김씨 외가는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넘어갔다. 김씨의 외삼촌은 ‘많이 배운’ 엘리트였지만,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밥상머리에서 외삼촌은 김씨 형제에게 한국 역사와 사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느이 박정희를 아나? 박정희가 원래 만주에서 군관학교 졸업한 거는? 그이 한국에서 대통령이었는데….”

한국에 오기 전 그는 랴오닝성 다롄시에 공장을 세운 한국 신발회사에서 근무했다. 한국 조직 문화라면 이미 익숙했다. 김씨는 2007년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와 아내를 두고 먼저 한국에 건너왔다. 경남 지역의 각종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2013년 대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6년간 떨어져 지낸 아이에 대한 감정은 애틋했다. 지금 대동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어느새 중국어보다 한국어를 편하게 쓴다.

그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귀화를 선택했다. 아직도 귀화 시험 보던 날 떨렸던 마음을 잊지 못한다.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야 하는데 4절에서 자꾸 가사를 까먹는 거라. 어휴, 귀화 시험 진짜 어려운 거예요.” 현재 대림2동 월세방에 살고 있는 김씨의 꿈은 더 넓고 쾌적한 집에서,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이다.

 

ⓒ시사IN 신선영중국식 빵은 김씨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다.
 

 

 

 

“난 대림동보다 홍대 앞이 좋아요”

류향이(24)

 

 

 

ⓒ시사IN 신선영한국식 메이크업을 하고 롱패딩 점퍼를 입은 류향이씨는
한국의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다.
지난해 12월30일 류씨가 서울 경복궁 일대를 찾았다.

류향이씨의 스마트폰에는 유독 가수 현아 사진이 많다. 당당하고 예뻐서 좋아한단다. 그는 한국에 온 지 채 1년이 안 되었다. 중국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 후 한국행을 택했다. 어머니는 이미 류씨가 어렸을 적 먼저 한국에 왔다. 그에게 대림동은 어쩔 수 없이 들르는 동네다. 한국어를 배우고, 미용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게 일차 목표다. 그러려면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한 학원이 몰려 있는 대림동을 들러야 한다.

하지만 류씨에게 대림동은 오래 머물고 싶은 동네는 아니다. 류씨 또래보다는 부모 세대가 좋아할 법한 상점과 시설이 몰려 있다. 대림동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옌볜 가요 노래방’이 많지만, 정작 그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케이팝 팬이었다. 또래 친구들과는 주로 홍대 앞에서 만난다. ‘코노(동전 노래방)’를 찾거나 친구와 거리를 돌아다닌다. 친한 친구는 류씨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지금은 유통업계에서 일한다.

언어에 재능이 있어서 한국어를 빨리 배우는 편이다. “일단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도록 공부한 다음에, 일본어나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살아본 적 없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기도 해요.” ‘전 세계 어디서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를 가진 새로운 세대. 류씨는 이제껏 대림동이 품어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이주민이다.

 

ⓒ시사IN 신선영류씨가 중국동포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언젠가 우리 사연이 드라마에 나오길”

윤금애(45·스마트폰 매장 운영)

 

 

 

ⓒ시사IN 신선영1월3일 대림역 인근 스마트폰 매장에서 윤금애씨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철모르던 시절, 한국에 가기만 하면 돈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처음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윤금애씨 조부모는 경북 상주에서, 외조부모는 경북 고령에서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넘어왔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인근 상즈(상지)시. 부모는 이곳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결혼해 하얼빈에서 터전을 일궜다. 군인 출신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유리천장에 부딪혔다.

유년 시절은 상대적으로 유복했지만, 중학생 때 아버지가 임종하며 집안이 기울었다. 윤씨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1994년 한국으로 떠났고, 윤씨도 스물여섯이던 2000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001년에서 2004년까지 대림2동에 있는 친구의 반지하 방에 얹혀살면서 강남 신사동에 있는 식당으로 매일 출퇴근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돈 모아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어요. 옷도 한 벌 가지고 계속 돌려 입고.” 인생에서 가장 숨 가쁘고 치열하게 살던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남편이 살던 안양에서 핸드폰 매장 일을 배웠고, 지금은 대림역 4번 출구 주변에서 스마트폰 매장을 운영한다.

“언젠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우리 이야기가 소재로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각자가 가진 사연과 역사가 많거든요.” 주말 밤 가게 문을 닫고 ‘자율방범대’ 옷을 챙겨 입던 윤씨가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중국동포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대림역 인근 자율방범대 활동을 이어나갔다. 20대는 너무 빨리, 힘들게 지나갔지만 그는 이제 정착민으로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

 

ⓒ시사IN 신선영윤씨는 주말 저녁마다 구로4동 자율방범대에서 활동한다.
재한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길 바라며 시작한 일이다.
 

 

※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자명 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