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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역사 만든 평범한 시골 전도사

2019년 02월 12일(화) 제594호
김형민 PD (SBS CNBC)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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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1일 경성 탑골공원에 수천명이 모였으나 ‘만세’ 소리는 터지지 않았다. 민족 대표 33인은 스스로 경찰에 잡혀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야만 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올라온 정재용이 외쳤다. “조선…독립…선언서.”

ⓒ연합뉴스
독립운동가 정재용이 북한산 백운대에 새겨놓은 3·1운동 기록문.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3·1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아빠도 거기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명칭이 중요한 건 아닐 거야. 뭐라고 부르든 1919년 3월1일은 우리 역사의 분수령이라 불러 마땅하니까. 그 이전과 이후의 조선은 확연히 달랐고, 조선 사람들도 그랬지. 일제 통계로 7500명 넘는 사망자를 내며 전개됐던 전국적 항쟁은 일본 경찰의 매질 앞에 흐물흐물하던 사람들의 팔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단다. 칼을 차고 가르치던 일본인 교사들 앞에 주눅 들었던 이들의 머리에 완연한 새바람을 불어넣었지. 중국의 혁명가 천두슈가 묘사한 바대로 3·1운동은 “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한 동시에 명료하고 정확한 관념을 갖추어 민의를 사용하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을 열었던” 일대 사건이었어. 오늘부터 몇 주간은 3·1운동의 폭발 와중에서 불꽃처럼 솟아나고 질풍처럼 내달렸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 자기 이름 석 자를 걸고 독립선언 대표로 나서는 것은 보통 이상의 결의였어. 33인 가운데 가장 젊었던 김창준(당시 중앙교회 전도사)의 회고를 들어보자. “선언서에 일단 서명하면 다시 살겠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처음 생각에는 내가 죽으면 어린 처자는 누가 보호하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다. (…) 가정보다 먼저 조국이다. 내 사랑하는 조국, 하나님의 유업이신 내 조국, 내 조국의 자유를 얻는 데 내 살과 피가 한 점의 보토(補土)가 될진대 이에서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33인 가운데 ‘변절’한 사람은 최린, 정춘수, 박희도 정도고, 대부분은 계속 일제에 맞서 싸웠거나 최소한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여생을 보냈단다. 의견에 따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쉽사리 폄하할 만한 이들은 아니라고 봐.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를 즈음 경성 시내에는 마른 장작이 쌓이듯 학생들이 모여들었어. 집결 장소는 탑골공원. 까만 교복 차림의 학생들은 기대와 불안, 초조와 설렘이 뒤섞인 채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기대했던 외침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초조하게 서 있었어. 황해도 해주에서 올라온 감리교회 전도사 정재용이었어. 2주일쯤 전인 2월17일, 정재용은 33인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편지를 받는단다.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획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니 시급히 상경하시오.” 그는 즉시 올라와서 정춘수 등 개신교 대표들과 접촉하고 3월1일의 거사 준비에 가담해.

정재용은 어떻게 독립선언서 ‘입수’했나


모두의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사 전날인 2월28일, 정재용은 김창준 전도사에게 다급한 부탁을 받아. “원산에 독립선언문을 보내야 하는데 곽명리 전도사가 원산으로 곧 출발한다 하오. 어서 경성역으로 가서 곽명리 전도사를 찾으시오.” 정재용은 유인물 한 보따리를 들고 나는 듯이 달려가서 곽명리에게 전했어. 그 와중에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떨어진 것을 주웠던지 독립선언문 한 장을 주머니에 넣게 돼.

다음 날 탑골공원에서 서성이던 정재용의 품 안에도 어제의 그 독립선언문이 들어 있었어. 태화관에 있던 민족 대표들은 스스로 경찰에 잡혀갔다 하니 아무리 기다려도 올 턱이 없었지.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 수천명은 누군가 나서서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어. 불쏘시개는 마련됐고 사람들 마음에 기름은 이미 부어져 있었다고나 할까. 다만 그 불을 댕길 불씨가 태화관 식당 방 안에서 깜박이다 만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지.

ⓒ연합뉴스TV
1961년 정재용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읽고 있다.

정재용은 품속의 독립선언문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어. 어젯밤 숨죽여 읽어보았던 유인물. 명문장가 최남선이 썼고 천도교인들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수천 부를 찍어 냈고 지금쯤 조선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읽어내리고 있을지 모를 독립선언문.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 한복판에 이 많은 인파가 집결했는데 이 선언문을 읽어내릴 사람이 없단 말인가. 

아마 정재용은 고민했을 거야. 내처 내가 읽어버릴까. 민족 대표들이 유혈을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독립선언 장소를 바꿨는데 혹여 내가 감당 못할 사태가 정말로 발생하면 어쩌나. 아무것도 아닌 시골 전도사인 내가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일제의 처지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셈인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고민은 짧았지만 치열했겠지.

결국 시골 전도사 정재용은 팔각정 위로 올라간단다. 그리고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어. 서두에 찍힌 두 글자, 독(獨)과 립(立)이 불화살처럼 그의 눈을 찔러왔겠지. 왈칵. 머리에서 뜨거운 것이 내려왔고 가슴에서는 10년을 쌓아온 울분이 불덩이가 되어 치밀어 올랐어. 마침내 정재용은 잃어버린 나라의 이름을 꺼낸다. 조선.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는 불온한 단어를 조선 뒤에 붙였어. “조선…독립…선언서.”

정재용의 목청이 점점 우렁차졌다. 그 목소리는 성능 좋은 폭탄의 파편처럼 탑골공원에 모인 인파의 가슴을 모두 찢어놓았지. 둔중한 침묵 속에 나직한 신음과 짜낸 듯한 탄성이 새어나오는 가운데 정재용은 낭독을 이어갔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드넓은 탑골공원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정재용의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맥박 소리는 천둥이 되어가고 있었어. 정재용이 울부짖듯 공약 3장을 읽으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절규했을 때 마침내 조선은, 9년 동안 처참하게 억눌리고 비참하게 짓밟히고 참담하게 모욕받던 조선은 폭발하고 말았어. “조선 독립 만세!”

정재용이 호기심으로 유인물 한 장을 빼두지 않고 원산 가는 전도사에게 통째로 전해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운명의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독립선언서를 꺼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 최악의 경우 학생 수천명은 맥없이 잡혀간 민족 대표들을 성토하다가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거기에 시골 교회 전도사 정재용이 있었어. 정재용의 용기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날인 3·1절, 갈라진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거의 유일한 이날을 폭발시킨 분화구가 되었지. 얘기했던 것처럼 역사는 정말로 평범한 사람에게 운명의 반지를 끼워주었던 거야.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가면 정재용이 새겨놓은 글귀를 볼 수 있어. 내용은 이래.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경성부 천진정에서 육당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병술년에 태어난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이 독립선언 만세를 도창(導唱)했다.” 백운대까지 끌과 정을 메고 올라와서 이 글귀를 바위에 새기면서 그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비범한 역사를 만든 평범한 시골 전도사 정재용은 그렇게 자신이 열어젖힌 역사를 또박또박 우리에게 전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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