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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밤 ‘신청곡’을 듣다

2019년 01월 31일(목) 제594호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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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청곡’은 타블로가 작곡하고 이소라가 노래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변함없이 라디오에 신청곡을 보내는 일을 생각하게 한다.

<더 파이팅>이라는 작품이 있다. 음악이 담긴 앨범은 아니다. 현재까지 무려 120권이 발간된, 권투를 다룬 만화책이다. 이 작품은 내게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유는 이렇다. 인생 전체로 보자면 나는 <더 파이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신뢰하지 않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에게 먼저 묻고 싶다. 당신이라면 주제를 어떻게 요약하겠나. ‘노력하면 이뤄진다’ 정도 되지 않겠나.

얼마 전 패션지 <에스콰이어>에 썼던 글 중 일부로 의견을 대신해본다. 나는 ‘스포츠가 곧 인생이다’라거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처럼 우리를 취하게 하는 거짓말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건, 스포츠이기에 가끔 벌어지는 기적 비슷한 것일 뿐이다. 노력은 당신을 배신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노력이 당신을 배신할지 안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뿐이다. 고로, 스포츠와 나의 삶은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쪽이 정신 건강에는 훨씬 이롭다.

ⓒ에르타알레 제공
‘신청곡’은 노랫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노래다.

그럼에도 나는 <더 파이팅>을 놓지 못한다.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애정과 능력의 상관관계에 내가 유독 집착하기 때문인 듯싶다. 애정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능력도 발휘될 수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나는 재능마저 일천한 사람이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널려 있고, 나보다 말 잘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는 걸 잘 안다. 나보다, 나보다, 나보다… 이거 참, 비교의 지옥에는 과연 한도 끝도 없다.

나에게도 허락된 딱 한 가지 재능이 있었다. 바로 만화 속 일보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조금’을 견뎌내고 마침내는 사랑할 수 있는 재능이다. 한데 어쩌면 라디오에서 신청곡을 받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청취자의 신청곡 중 90% 이상은 내가 다 아는 노래다. 그래서 나머지 10% 정도가 내게는 중요하다. 빼놓지 않고 일일이 다 들어보려 애쓴다. 그 와중에 보물 같은 곡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런 순간들이 ‘아주 조금’씩 채워져 언젠가는 100%에 다가설 수 있기를 소망한다. 물론 현실계에서 100%는 환상에 불과함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환상 속의 그대에게 ‘다가선다’는 태도를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다는 의미다.

신청한 이에게는 간절한 편지와 같은


소망하던 차에 만난 노래 한 곡을 소개하려 한다. 타블로가 작곡하고 이소라가 노래한 ‘신청곡’이다. 여기에 방탄소년단의 슈가가 참여해 랩을 하고 가사도 썼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신청곡’을 감상하려 한다면, 노랫말을 꼭 보기 바란다. 겨울밤에 참 듣기 좋은 이 곡을 플레이하면서 내게는 그것이 수많은 신청곡 중 하나지만 신청한 개인에게는 간절한 편지와도 같은 것임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변함없이 라디오를 트는 청취자들이 신청곡을 보내고, 이 신청곡이 하나둘 쌓여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임을 다시금 절감했다. 어디 과거의 나뿐인가. 이 신청곡들이 미래의 나를 조금씩 키워줄 거라는 점 앞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주저하지 말고 신청곡을 팍팍 보내주시라. 최선을 다해 정리해서 DJ에게 전달할 것임을 약속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평론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문장을 내가 쓸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지 오래다. 대신 나는 아주 조금씩 전진할 것이다. 소처럼 우직하게, 일보(一步)라는 이름을 믿고. 혹여 노력에 배신당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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