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일본 대사관 앞 1000회차 정기 수요시위 때부터 김복동 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다. 그 뒤 할머니는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곤 하셨다. 그러면 다른 곳에 있다가도 가장 먼저 달려가 상황을 알려드렸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손주로 맞아주셨다. 지난 8개월간 모든 걸 제쳐두고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의 마지막을 기록했다. 그 기간 기억에 남은 것들을 다시 돌아봤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 귓가에 “할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나도”라고 하셔서 크게 놀랐다. 암 조직이 온몸을 침범한 상태에서 의식까지 멀어져가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했더니 또 “나도…”라고 말해주셨다. 평소 할머니와 인사처럼 자주 하던 말이었고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1분이라는 기적이 찾아왔고, 이 말이 할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몇 시간 뒤 할머니는 남은 사력을 다해 “재일 조선학교 지원”과 “끝까지 싸워달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으셨다.


ⓒ시사IN 조남진


“수요집회 가야 하는데 못 가서 어쩌냐”

사실 이 유언 말고도 일본 정부를 향해 심한 욕설도 했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분께서 마지막에 저런 욕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할머니 곁에 있었지만 피해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분노와 한이 어떤 것인지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에 한 말 중에서 딱 그 욕설만 힘을 주셨는데, 본인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떠난다는 게 어떤 건지를 보여주었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모시고 갔다. 다들 맹장염으로 생각했는데 결과는 결장암이었다. 대장이 꺾어지는 부위를 혹이 막고 있어서 부풀어 올라 가스가 차는 바람에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다. 할머니에게는 암이라 알리지 않고 몸속에 안 좋은 게 있으니 그것만 제거하자 했고, 담배까지 끊을 수 있게 설득했다.

안타까웠던 것은 90세가 넘은 고령인 탓에 일반인들처럼 항암 치료를 할 수 없고, 회복조차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태가 나아지는 것은 기적에 맡기고 더 악화되지 않도록 모두 힘을 썼다. 그러나 그 뒤부터 할머니께서는 급격히 쇠약해져갔고 위급한 상태로 응급실을 자주 찾았다.

나중에야 본인에게 오는 통증을 통해 암이라는 걸 알게 된 할머니는 “전쟁 속에서도 살아왔는데 이까짓 암은 금방 이겨낸다”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중 눈에 띄게 건강한 편이었고 활동도 가장 활발히 하셨기 때문에 검진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건강 상태가 좋은 날 할머니께서 담당 의사에게 “오진이 아니냐? 나 지금 하나도 안 아픈데 암이라고 하는 건 오진이 맞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라고 하셨을 때 옆에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병에 걸렸다며 힘들어하는 것보다 오진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의욕이 끓어오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역시 김복동 할머니다. 할머니는 뭐든 다 이겨내시는구나’라고 다시금 생각했다.


ⓒ미디어몽구김복동 할머니는 전 재산 5000만원을 재일 조선학교에 기부했다. 아래는 김 할머니가 생활하던 방.

그러나 이런 굳센 의지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는 힘들어했다. 너무 아파하셨다. 어지간해서는 아프다는 말을 안 하시는데 배를 움켜쥐며 통증을 호소했다. 손과 발도 붓기 시작했다. 흡입과 배설이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데, 순환이 안 되니까 장기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싸움은 저희가 할 테니 편히 계시라’ 했지만 매주 수요일만 되면 “일본 대사관 앞에 가야 되는데 못 가서 어쩌냐”라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럴 때면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병상에 누워 구호 외치는 할머니 모습을 휴대전화 영상에 담아서 수요집회 때 보여주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 돕기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 이야기만 하면 할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윤미향 대표가 “왜 그렇게 재일 조선인 학생들에게 관심이 가시냐”라고 물으니 “내가 조선 사람이거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전 재산 5000만원을 재일 조선학교에 기부했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이었다. 그때 첫마디를 잊을 수 없다. “이거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라고 하셨다.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혹시 그 돈을 기부한 것에 대해 본인이 원치 않는데 윤 대표나 정대협이 시켜서 한 일로 공격당할까 봐 미리 막아주기 위해 하신 말이었다. 마음이 뭉클했다. 할머니께서는 기부 후 “지금 기분이 만점이다”라며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가니 내 뒤를 따르라”라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마지막 해외 활동이라는 걸 알고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적도 있었는데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뭔가를 직접 해주기 위해서였다. 학교 정문 앞에서 휠체어 타는 게 싫다며 걸어서 들어가겠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아이들에게 당당한 모습, 아프지만 잘 견디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날 일정을 소화한 뒤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못하실 정도로 깊이 잠드셨다. 윤미향 대표는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다고 표현했다.

ⓒ미디어몽구김복동 할머니(오른쪽)와 김정환씨(가운데)가 병상에서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


“엄마가 보고 싶다”

어느 날 평소처럼 할머니 병실에 들어갔는데 병실 안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악취가 났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었다. 소변도 막히고 순환도 안 되다 보니까 몸속의 노폐물이 분비가 안 되어서 나는 냄새로 보였다. 너무나 깨끗하고 정갈하셨는데 스스로 이걸 어떻게 참아내실까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늘 강인한 모습만 보다 신음하며 통증을 참아내고 있는 것을 보는 게 괴로웠다. 할머니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외부에서 병문안 오는 걸 말리고 싶기도 했다. 병실에 방향제를 사다 놓을까 뭘 해놓을까 별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하루는 할머니께 누가 가장 보고 싶으냐고 여쭈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병문안을 많이 오고 옆에 사람이 많아도 가족이 수발을 들어줄 때 마음이 편한데 할머니는 그렇지 못해 안타까웠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혹시나 할머니와 닮은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남인데도 기다리는데 할머니는 얼마나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까’ 하며 기대했지만 끝내 가족은 오지 않았다.

말조차 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할 무렵 그동안 곁에서 함께 싸워왔던 윤미향 대표와 손영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 소장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그동안 나 때문에 가지고 있을 상처와 서운함이 있다면 미안하고 지금껏 쓰잘 것 없는 나를 떠받들어서 이렇게 만들어주고 내 이름을 날리게 해주어서 고맙다. 윤 대표도 상금 한번 탈 수 있게끔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자 윤 대표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며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통증이 온몸을 다 덮고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드는 중인데도 본인의 아픔은 삼키고 여전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말하기도, 눈을 뜨기도 힘든 상황이 되자 할머니는 손을 꼭 잡고 계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 꼭 잡아주시던 손이 아직도 느껴진다. 그 힘으로 다시 일어나실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할머니께서는 이 세상과 차츰 멀어져갔다. 병상에서 한 말씀 중 평생 잊을 수가 없는 말은 “아직 할일이 남아 있는데… 더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라고 하신 것이다.

할머니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꼭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곳이 있다. 연세의료원 노조이다. 할머니께서 병원에 실려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모든 걸 챙겨주고 불편함 없게 신경을 써주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는데 “할머니께서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시라”며 할머니를 챙겨주었다.

1월28일 저녁 10시41분 할머니께서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 기간 전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일어난 추모 열기를 보며 할머니가 늘 이야기하셨던 희망을 보았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하겠다는 결의로 더 큰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께서 이루어놓은 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할머니 스물세 분이 돌아가시면 끝나는 싸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끝이 아니구나,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희망의 씨를 뿌려주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나는 〈뉴스타파〉 송원근 PD, 김기철 기자와 함께 김복동 할머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위대했던 지난 삶의 역사를 잘 담아, 어서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할머니께로 달려가고 싶다. 할머니가 떠났다는 게 지금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벌써 그립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할머니 사랑해요.


ⓒ시사IN 신선영



기자명 김정환 (미디어몽구 운영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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