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중요하다. 이 책이 있기 전까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더러운 얼룩으로만 취급되었다. 예컨대 조기숙은 〈포퓰리즘의 정치학-안철수와 로스 페로의 부상과 추락〉(인간사랑, 2016)에서 포퓰리즘을 ‘정치 불신과 냉소주의’의 산물로 업신여기고 있고, 박구용 역시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메디치, 2018)에서 여태까지 되풀이되어온 포퓰리즘에 관한 상식을 반복한다.

‘큰 틀에서 볼 때 신종 포퓰리즘의 주역과 신자유주의의 주역은 다르지 않다. 신종 포퓰리즘 선동의 정점에는 언제나 신자유주의의 최대 수혜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카리스마, 즉 권위적 리더십은 대부분 개인적 성공신화에 바탕을 둔다. 포퓰리즘 선동가와 이들의 선전에 동원된 대중과 다중은 민주주의라는 절차와 제도, 그리고 법을 우회하거나 심지어 파괴하는 힘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매개로 하향적 연대를 구축한다. 이 연대는 의회와 정당, 심지어 시민사회까지 무력화시키려는 전략적 연대다.’

ⓒ이지영

박구용은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종 포퓰리즘’을 한사코 극우 또는 우파의 대중 선동 현상으로 파악하면서, 자신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생각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베를루스코니(이탈리아), 로스 페로(미국), 안철수(한국) 같은 성공신화를 가진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동원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Ö)과 프랑스의 국민전선(FN)이 우파 포퓰리즘 정당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리자(Syriza)와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는 엄연한 좌파 포퓰리즘 정당이다. 조기숙이나 박구용 같은 진보 학자와 많은 좌파 이론가들은 포퓰리즘을 오물처럼 피한다. 포퓰리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사용법을 제시하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진보 학자들과 좌파 이론가들에게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문학세계사, 2019)는 제목부터가 ‘뜨거운 아이스크림’ 같은 형용모순이다. 나아가 무페의 주장은 이미 놀란 이들을 뒤로 나자빠지게 만든다. 무페의 주장은 정확히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무력한 정치를 새로 점화시키는 계기이다. 우파가 포퓰리즘을 통해 전유한 대중을 지금 빼앗아오지 않으면, 좌파는 영영 패배자가 된다. 현재 유럽의 상황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도 그 사실을 입증한다. 대중을 우파가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무페가 포퓰리즘에 주목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무페는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에서 ‘대중 영합적인 우파 정당들이 점점 더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98년 발표한 저 논문에서 무페는 ‘우파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릴 것에 대해서만 우려했지, 아직까지 포퓰리즘을 좌파의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헤게모니 이론가이자 민주주의 이론가인 무페가 좌파 포퓰리즘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극우 전체주의자들이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을 적절히 이용해왔던 역사적 전례가 있음에도, 좌파는 포퓰리즘의 이로운 점을 활용하기보다 사교(邪敎)처럼 피해왔다. 헤게모니 이론가인 무페는 그 원인을 좌파의 계급 본질주의에서 찾는다. 정통 좌파는 사회변혁의 주체로 늘 순수하고 단일한 노동자 집단을 중시했다. 하므로 정통 좌파에게 포퓰리즘 정치의 가담자인 대중은 믿을 수 없는 잡동사니나 같았다. 이 때문에 좌파로부터 홀대받은 사회 주변부의 소외되고 낙오된 집단은 우파 포퓰리즘에 쉽게 포획된다.

무페는 오래전부터 그의 이론적 동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사회변혁의 주체=노동자’라는 계급 본질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회변혁 계급은 이미 형성된 채로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정치적·문화적(상징적)으로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한때의 사회변혁 주체가 반동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의 대기업 노조는 사회와 노동 현장을 변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무력한 정치를 점화시키는 계기

좌파 포퓰리즘의 핵심은 노동자들이 점차 파편화되는 현상과 다양한 민주주의의 요구를 동시에 파악하면서, 평등과 대중 주권을 관건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급진화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좌파 포퓰리즘은 자본주의와 과두제에 맞서 헤게모니 전선에 함께 나설 수 있는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 투쟁가, 성소수자, 불안정한 중산층, 이민 노동자, 빈곤층, 노인 등과 함께 가치의 등가사슬(a chain of equivalence)을 형성해야 한다.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민주주의 이론가로서 무페는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전통이 있다고 늘 강조해왔다. 하나는 법의 지배, 권력분립, 개인의 자유 보호와 같은 자유주의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과 대중 주권이 중심 사상인 민주주의 전통이다. 양자의 조합은 원래 물과 기름 같은 것이었으나 신자유주의는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 두 전통이 자유민주주의로 합체되면서 민주주의는 합의와 이익 분점이라는 자유주의적 절차로 수렴·축소되었고, 정치를 정치이게 하는 경합적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신자유주의가 정착한 모든 나라에서 중도정치가 시대의 선(善)이 되고, 전통적인 좌우 양당은 적대를 내버린 채 친구가 되었다. 무페는 정치의 고유한 성질인 적대가 사라진 공간으로 대중을 흡입하는 네 가지 유사 정치가 출현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정체성 정치, 둘째 스캔들 정치(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 셋째 문화 전쟁(낙태· 진화론·동성애 등), 넷째가 오늘의 화제인 포퓰리즘이다.

무페는 좌우 엘리트 정치가 담합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성 엘리트에 대한 고발 형태”를 취하는 포퓰리즘은 대중이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신호와 같다면서, 포퓰리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 외엔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탈정치적 상황을 현상 유지하려는 자들의 주장”이라고까지 말한다.

자본가와 정치 엘리트로 구성된 과두 계급은 대중의 온갖 저항적 정치운동에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 전략을 민주주의 전통에 각인’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시급한 것은 포퓰리즘 계기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기가 또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기획은 성공하게 될까? 물론 아무런 보장도 없지만, 현재 국면이 제공하는 기회를 놓친다면 아주 심각한 실수가 될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