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8일, 폭설이 내리는 도쿄 간다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600여 명은 비장한 각오로 2·8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했다. 이들은 ‘우리 겨레는 결코 무단 전제의 부정 불평등한 정치 아래에서 생존과 발전을 누릴 수 없’고 ‘한·일 합병이 우리 겨레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았고 우리 겨레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 평화를 뒤흔들 원인이 된다’며 조선 독립을 주장했다. 100년 전 조선 청년들은 일본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조국 독립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고, 이것은 이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출발이 되었다.

1910년 시작된 무단통치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종교계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언론·결사·집회의 자유를 박탈했다. 이에 비해 일본으로 유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치안경찰법이나 신문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조선어로 정보를 발신하고 조선 사회를 근대적으로 계몽하는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12년 설립되어 1930년까지 활동한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는 1914년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창간해, 조선말로 도쿄 유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출판 활동을 했다.

ⓒ연합뉴스2월8일 도쿄에 있는 재일본 한국YMCA에서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학우회·신아동맹단과 2·8 독립선언

학우회의 활동 근거지가 된 곳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현 재일본 한국YMCA)이다. 처음에는 유학생들의 숙소에서 모이다가 1906년 미국의 자금과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학우회의 안정적인 활동 거점이 되었다. 합법적 범위 내에서 ‘선 실력 양성, 후 독립’을 지향하던 학우회의 계몽운동은 이후 독립운동으로 발전한다.

학우회 운동 전환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신아동맹단이다. 조선 독립운동과 아시아와의 관계 연구자인 규슈 대학의 오노 야스테루 교수 연구에 따르면, 학우회 운동은 동아시아의 반제국주의 네트워크를 통해 독립운동으로 발전한다. 1910년대 조선과 타이완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없었기에 조선과 타이완 그리고 중국의 많은 청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신아동맹단은 1916년 도쿄에서 한국·중국·타이완·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유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 조직이다. 단장은 신해혁명에 참가한 중국 혁명가 황제민(黃介民)으로 활동 거점은 도쿄 중국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신아동맹단은 1910년대 유일하게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반제민족해방운동을 목표로 내걸고 활동한 단체다. 중국인 혁명가들의 활동 경험은 신아동맹단의 조선 유학생들에게 전수되었다. 조선 학우회의 간부였던 장덕수·신익희·김명식은 훗날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국가보훈처 제공피우진 국가보훈처장(오른쪽)과 이종걸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이 도쿄의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를 참배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레닌이 〈평화에 대한 포고〉에서 민족자결을 제창하고,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우자 그해 11월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도 민족자결이 의제가 되었다. 도쿄의 조선 청년들은 이 흐름에 맞춰 2·8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1919년 2월8일 학우회의 예산 총회라는 명분으로 집회를 연 조선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에 파리 강화조약을 언급하며 민족자결주의 적용을 요구했다. 2·8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그리고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는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일본의 귀족원, 중의원 의원들, 정부 요인, 일본의 각국 대사, 내외 언론기관 앞으로 우송되었다. 2·8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국제사회로도 발신됐다. 오후 2시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마자 경찰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행사장을 빠져나간 학생이나 일찍 풀려난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조선에 전했다. 2·8 독립선언 준비 자금 마련을 위해 앞장섰던 김마리아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일주일간 취조를 받았고, 2월17일 일본 여성으로 위장하여 기모노 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국해서 교육계와 종교계 지도자들에게 전 민족의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2·8 독립선언서에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부터 무단통치까지 일본이 어떻게 조선 민족의 권리를 빼앗고 자유를 짓밟았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 의회와 정부에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베 정권, ‘메이지 150년’ 미화에 주력

일본 경찰과 조선총독부는 2월에서 3월로 이어진 독립 만세운동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조선 민중의 비폭력 저항을 당국과 미디어는 ‘폭동’이라고 매도했다. ‘폭동’이라는 매도는 일본 국민에게 공포와 증오를 심고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적 편견을 증폭시켰다. 그 결과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 후 해군 무선송신소에서 발신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선동은 순식간에 확대되어 약 7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참사를 낳았다.

2018년부터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이어져왔다. 2018년부터 행사들이 진행된 배경에는 아베 신조 정권이 미화하려는 ‘메이지 150년’도 있다. 1868년 10월 일본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 중심의 근대국가 개혁을 이뤄냈다. 아베 총리가 강조하는 ‘열강의 식민지가 될 뻔한 위기에서 독립을 지키고 근대화를 성취한 빛나는 역사’로서의 메이지 유신 말이다. 2018년 아베 정권은 내각 관방에 ‘메이지 150년 관련 시책 추진실’을 설치, 전국의 지자체를 동원해 메이지 정신을 배우고 일본의 강점을 재인식하는 ‘메이지 150년’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메이지 유신으로 경제·군사력을 쌓은 일본은 대외적으로 청일전쟁과 타이완 할양(1895), 러일전쟁(1905)에 이어 1910년 조선 강제 병합, 1945년 패전까지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삼았다. 대내적으로는 자유 민권운동을 탄압했고, ‘천황’ 주권의 대일본제국헌법 제정(1889), 교육칙어를 발표해 국민들에게 ‘충군애국, 멸사봉공’을 강요하며 일본을 중일전쟁,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내몰았다. ‘영광’의 메이지 150년만 기리고 침략의 역사는 은폐하려는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지금 도쿄에서는 메이지 150년과 2·8 독립선언-3·1운동 100주년을 식민지 지배 역사와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100년 전 조선 청년들의 ‘동양 평화, 세계 평화’를 갈구하는 요청에 응답하고자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지배와 억압 구조에 저항한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을 품고 연대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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