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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질’ 때려치우고 독립 만세 외친 그들

2019년 03월 07일(목) 제598호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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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는 1919년 4월3일 식목일을 기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식목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 만세 시위장으로 변했다. 이후 남원에서만 면장 6명, 면서기 7명이 사표를 던졌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을 많이 쓴다. 여기서 ‘면장’이란 논어에 나오는 ‘면면장(免面牆)’에서 유래된 말이야. 장(牆)이란 담벼락을 말해. 즉 면면장이란 담벼락에 얼굴(面)을 대듯 갑갑한 상황을 면(免)한다는 뜻이지. 뭘 알아야 갑갑함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인데, 언제부턴지 이 말이 ‘면장’으로 줄여 쓰이면서 행정구역상 면(面)의 책임자인 면장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쓰이고 있어. 이런 식이지. “뭣도 모르면서 무슨 면장을 한다고.”

왜 이렇게 됐을까 질문을 던지면 그 답은 여러 가지겠지만 아빠는 면장이 꽤 큰 ‘벼슬’로 여겨지던 시대의 유물일 수도 있다고 봐. 면장제가 확립된 것은 1910년 10월 일제가 수탈정책을 강화하고자 하부 지방행정조직까지 정비할 목적으로 ‘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때부터였다고 해. 면장은 도장관, 즉 도지사가 직접 임명하는 각 면의 최고 책임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보면 백종두라는 인물이 등장해. 원래 아전 출신인데 일본에 빌붙어 일진회 군산지부장을 하다가 죽산면장으로 임명돼 온갖 패악질을 다 하고는 3·1운동 때 맞아죽는 걸로 나오지. 그렇듯 일제는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할 만한 이들을 골라 면장 자리에 앉혔고 면장들의 위세는 일제강점기 내내 대단했단다. 100년 전 기미년 봄, 조선 독립 만세의 홍수 속에 일본의 충복 자리를 걷어차고 나선 면장들도 있었어.
ⓒ시사IN 이명익
2월2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를 둘러보는 모습.

1919년 봄은 뜨거웠어. 한반도 북부와 서울에서 먼저 뜨겁게 타오른 만세의 불길은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어.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가 3월5일 군산에서 터져 나온 뒤 전북 일원으로 만세가 확대됐다는 얘기는 했지? 전라북도의 동쪽, 지리산 자락 남원 역시 3월 초부터 뒤숭숭한 분위기였어. 천도교인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남원 군내 곳곳에 나붙었는데 어떤 이들은 대담하게도 면사무소와 헌병 분견대 앞 게시판에 떡하니 독립선언서를 걸어두기도 했단다. 당연히 일본 헌병들은 눈에 불을 켰고 그 서슬 앞에서 남원은 이렇다 할 만세 시위 없이 4월을 넘기게 돼.

이를 원통히 여기며 이를 갈던 조선인 면장이 있었어.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야. 이석기는 3월10일 인근 임실군 오수리에서 일어났던 오수보통학교, 그러니까 요즘으로 하면 오수초등학교 학생들이 오수역 근처에서 벌인 만세 시위를 잘 알고 있었다. 소년들이 애타게 내지른 독립 만세는 오수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수천명 단위의 만세 시위가 이어졌단다. 이 오수보통학교 시위를 은밀히 주도한 이가 이석기 면장의 조카인 오수보통학교 교사 이광수였거든. 서울에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과 만나고 돌아와 오수 시위를 주도한 이광수는 아저씨 이석기 면장을 찾아와 열변을 토했을 거야.

“아저씨 이제 면장질 그만할 때가 됐습니다. 애들이 만세 부르고 두들겨 맞는데 어찌 낫살이나 먹어가지고 일본놈들 발바닥이나 핥고 살겠소.” 이석기 면장의 심경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남원 지역은 일제 헌병대가 밤이고 낮이고 눈을 부라리고 설치고 다니는 판에 도통 사람들을 모으기가 어려웠지. 고심하던 이석기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른다. “식수기념일!” 조선총독부는 1911년, 4월3일을 식목일로 정해놓고 이날이 오면 각 행정단위와 학교 등에 나무 심기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게 했거든. 즉 사람들을 아무리 끌어모은들 일제 헌병대나 순사들이 눈을 부릅뜰 일이 없다는 뜻이었어.

이석기 면장은 덕과면서기 조동선과 함께 덕과면 신양리 구장 이병규, 고정리 구장 이명원 등과 머리를 맞댔어. “4월3일 동해골(전북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 뒷산 도화곡)에서 거사를 하세. 전주며 오수며 독립운동이 한창인데 우리 남원만 조용하니 다른 지역 사람들 보기 부끄럽네.” 그러고는 면내 각 구장에게 이런 통보를 보내. “4월3일은 식수기념일이니 집집마다 반드시 한 명씩 내보내 동해골로 모이시오.” 4월3일 덕과면 내 여러 마을 사람들은 동해골에 모여 얌전히 나무를 심었어. 이석기 면장은 치밀하게도 막걸리까지 준비해서 사람들에게 먹이며 완벽하게 일본 헌병의 눈을 속였지. 나무 심기 행사가 끝나고 막걸리도 한 순배 돌고 사람들의 얼굴에 붉은 기색이 떠오를 무렵, 갑자기 이석기 면장이 날카롭게 외쳤어. “조선 독립 만세!”

하동, 당진, 영월 등 면장들도 가세


아무리 세상사에 둔감했던 사람이라 해도 1919년 기미년 봄의 조선 사람이라면 그 외침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지. 면장이 만세를 부를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이어 몇 사람이 조선 독립 만세를 따라 외치면서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 만세 시위장으로 변해버렸어. 출장 나온 일본 헌병은 어쩔 줄을 몰랐지. “면장, 미쳤소?” 애타게 이석기 면장을 불렀겠지만 이미 이석기는 10년 묵은 분노의 화신으로 덕과면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어. 일제 법원의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석기의 모습은 가히 영웅적이야.

헌병주재소로 방향을 잡고 만세 행진을 이끌던 도중, 이석기는 어느 집 옥상에 올라가 준비한 격문을 낭독한다. “신성한 단군의 자손으로 반만년 동방에서 웅비한 우리 조선 민족은 경술년이 원수가 되어 금수강산이 식민지도로 출판되고 신성한 자손은 노예의 민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치욕을 받고 무슨 면목으로 지하의 성조를 볼 수 있겠는가. (중략) 만강의 숙성을 다해 조선 독립을 외치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만세!”

코가 석 자는 빠져서 달려온 일제 헌병들 앞에 이석기는 스스로 나서. “내가 덕과면장이고 내가 다 주동했소.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시오.” 일단 시위는 마무리됐지만 남원 사람들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 이튿날은 남원 장날이었어. 남원장은 전남북을 통틀어 가장 큰 장 중의 하나였다. 천도교 교구장 유태홍과 황찬서, 방극용 등 남원 사람들은 이 장날 인파 속에서 만세 시위를 결행했고 엄청난 인파에 기가 질린 일본 헌병들은 총을 난사해 수십명 사상자를 냈지. 이후 남원읍내에서는 면장 6명과 면서기 7명이 사표를 내던졌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일제 행정의 말단 책임자로 지내던 면장들이 만세 시위에 떨쳐나선 건 남원만이 아니었단다. 1919년 3월14일 경남 하동군 적량면장 박치화는 사표를 제출하고 스스로 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하동군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충남 당진의 대호지면 면장 이인정도 예순한 살의 고령을 무릅쓰고 면민들과 만세를 불렀으며, 강원도 영월에서도 양변면장 박수창이 태극기를 들었어.

물론 많은 면장들이 알량한 권력욕과 일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제의 주구 노릇을 이어갔고 그보다 높은 지위에 있던 조선인들이 ‘(독립운동) 자제단’까지 만들어 3·1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 발버둥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민족적 울분 앞에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꽃길’을 마다한 채,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는 험로를 굳이 택했던 이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니. “우리 마음의 기세와 날카로운 외침은 외국의 거대한 대포보다도 나으니 한 마음 한 몸으로 광복의 땅으로 나아갑시다(박치화 면장이 쓴 ‘대한독립선언서’를 풀어 쓴 한 구절).” 그들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어떤 걸 알았기에 일제의 면장을 면(免)하고 조선의 면장, 조선인의 선봉이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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