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가 도쿄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을 찾은 날이었다. 행사장의 400석 자리는 일찌감치 마감되었고 따로 마련된 라이브 중계석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날 김승복 ‘쿠온’ 출판사 대표는 서울역 커피숍에서 정부 관계자를 만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문을 일본에서 출간하기 위해서였다. 두꺼운 연설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구류가 담긴 큰 가방을 들고 〈시사IN〉 편집국에 들어선 그에게 일본에서의 ‘김지영 열풍’에 관해 물었다. 과장된 건 아닌가. 그가 고개를 저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많이 팔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본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막 높아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케이팝 등과 비교해 국내 언론의 반응이 적어 오히려 서운하다.”

김승복 대표는 서점과 출판사 수백 개가 모여 있는 일본 도쿄의 진보초에서 출판사 ‘쿠온’과 북카페 ‘책거리’를 함께 운영한다. 한국 문학을 비롯해 한국 관련서를 번역 출판한다. 양국을 오가며 국내서를 일본에, 일본서를 한국에 소개하고 출간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코디네이터 구실도 한다. 다른 출판사의 책을 기획하기도 한다. ‘강상중 도쿄 대학 명예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문을 해석한다’는 콘셉트의 기획도 평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좋아하던 그에게서 나왔다.

ⓒ시사IN 신선영
〈82년생 김지영〉은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출간된 지 두 달 만에 8만 부 이상 팔렸다. 김 대표의 기억으로 한국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쿠온이 한국 소설을 낼 때 통상 2000부를 찍는다. 일본인이 1억2000만여 명인데 해외 문학 독자를 모두 합쳐도 약 3000명이란 얘기를 들었다. 8만 부 판매는 일본 작가들도 어렵다.”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도 반응이 좋았다. 쿠온은 지난해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를 출간하고 작가를 초청했다. 최 작가의 차기작 〈내게 무해한 사람〉의 출판에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가 여럿이다. 일본 유명 작가의 작품을 두고 국내 출판사들이 경쟁하듯, 한국 작가에게 경쟁이 붙는 현상이 등장했다.

〈82년생 김지영〉을 출간한 지쿠마쇼보 출판사는 1940년부터 각종 인문서,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책을 펴낸 중견 출판사다. 판권을 사들일 때 김 대표 역시 다른 출판사의 중계를 거들었다. “지쿠마쇼보 출판사에서 냈기 때문에 신뢰를 얻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이 제시한 금액의 배 이상을 부른 출판사도 있었는데 전략적인 판단을 한 것 같다.” 그는 조남주 작가를 한국 문학의 ‘욘사마’라 칭했다. 일종의 ‘내비게이터’ 역할을 기대해서다.

김 대표가 출판계에 발을 들인 지는 12년째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 니혼 대학 예술학부 문예과에 입학했다. 졸업 즈음, 한국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일본의 광고회사에 들어가서 일하다 2001년 독립해 직접 회사를 차렸다. 웹 에이전시로 홈페이지 제작 등을 했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일을 많이 했고 돈도 벌었다. 한국에서 폰트 디자인이 유행할 때 일본에 비슷한 아이템을 들여오기 위해 야후와 도시바 등을 찾기도 했다. 폰트 디자이너를 모아 협회를 만들었다. 필요하면 뭐든 해보는 편이다. 디즈니 사에서 미키마우스 캐릭터의 폰트를 의뢰하기도 했다. 신뢰도가 높아져 일이 끊이지 않았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가 오면서 어려움이 닥쳤다. 외부 요인에 흔들리는 삶은 그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걸 하기로 했다. 이전부터 일본 출판사에 한국 책을 내보라고 권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지인이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하면 되지.” 그렇게 시작했다. 회사의 규모가 작을수록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광고회사의 경험이 유용했다. ‘원소스 멀티유즈’를 궁리했고 좋은 원재료가 있을 때 상품화하는 감각을 익혔다.

ⓒ책거리 제공김승복 대표(맨 오른쪽)가 ‘책거리’에서 최은영 작가(오른쪽 두 번째)와 일본 독자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한국 문학, 일본 시민권 얻었다”

쿠온의 첫 책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2011년 3월, 출간을 앞두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한국 사람들이 앞다투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김 대표는 떠날 수 없었다. 5월에서야 책이 나오자 각광을 받았다. “이런 소설을 우리가 만났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한국 소설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소설이었고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작품이었다. 그 반응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출간 뒤 한두 달이 지나야 반응이 온다. 서점에 갔을 때 직원이 책의 표지인 양파 그림을 기억하곤 ‘다마네기’라고 알은체를 해주어 기뻤다. 훗날 맨부커 상을 수상했고 지금껏 1만여 권이 나갔다.

초창기, 한국 작가들 일부는 쿠온에서 책 내기를 꺼렸다. 직원 두 명의 작은 출판사였다. 큰 출판사와 계약하겠다며 거절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 김 대표는 쿠온을 ‘안테나숍’이라고 소개했다. 쿠온을 통해 소개된 작가들이 이후 규모 있는 출판사와 계약을 맺는 건 언제든 환영이다. 쿠온의 ‘새로운 한국 문학 시리즈’는 2000년 이후 쓰인 한국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김중혁, 김애란, 김연수, 박민규, 정세랑 등의 책이다. 이전에는 민족과 이데올로기, 분단, 학생운동 등 보편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한국의 특수 상황을 그린 작품이 많았다. 보편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 젊은 독자에게 소구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쿠온의 시도는 ‘처음’이라 일본에서도 주목되었다.

김 대표는 2011년부터 케이팝 다음은 ‘케이문학’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케이북 진흥회’를 만들어 아직 번역이 안 된 한국의 좋은 책을 소개하는 책자를 발행했다. 일본의 출판 편집자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도 열었다. 한국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한류의 뿌리가 깊고 외연도 넓다. “나는 1969년에 태어나 대학까지 한국에서 마쳤지만 ‘마징가제트’와 ‘캔디’ 같은 서브컬처의 경험 때문에 일본에 오게 되었다. 하루키 열풍은 그 뒤다. 서브컬처로 접근했다가 문학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다. 그걸 몸으로 경험했다. 한국 작가들이 쟁쟁하니까 한류 문학 붐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케이팝을 즐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문학으로 이어질 거고 그때를 위해 번역된 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그는 ‘한국 문학이 시민권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던 중 ‘김지영’이 터졌다. “김지영 열풍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욘사마에게도 감사할 일이고 축적된 시간과 역사가 있다. 이 현상이 가져올 제2의 김지영이 또 있을 거고 그걸 준비해야 한다.”

김 대표가 보기에 한국 문학은 일본의 주류 문학과는 좀 다르다. 사회의 아픔이나 역사적 사건을 작품에 녹여내는 작품이 많다. “사회적 배경을 몰라도 작품 자체로 뛰어난데, 배경까지 알면 손뼉을 치게 된다. 피상적이지 않아서 좋다. 장사하는 사람으로서는 굉장한 콘텐츠이고 소중한 상품이다.” 정작 국내에선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 한국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지지가 높은 편은 아니다. ‘퀴어문학’ 등 국내의 최신 작품도 두루 챙겨 읽는 김 대표는 “잘된다는 것의 기준이 베스트셀러면 그럴 수 있다. 판매로 넘버원은 아니지만 작품으로는 좋은 것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도쿄에서 ‘코리안 북 페스티벌’ 열 예정

기대와 동시에 우려도 있다.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을 때의 경험 때문이다. 드라마의 명대사를 추려 일본어로 풀이하는 책을 만들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인세를 높게 불렀다. 문화가 확산되려면 많이 팔아 나눠 가져야 하는데 처음부터 비용을 세게 부르면 모두 힘들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문학이 그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더러 한국 작가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내겐 한국 작가를 일본에 소개하고 싶은 욕심과 일본 내 한국 문학의 시장을 넓히고 싶은 욕심 두 가지가 있다. 후자가 우선이다.”

김 대표의 올해 목표는 11월에 일본 도쿄에서 ‘코리안 북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다. 또 다른 조남주를 소개하는 자리다. 한국 문학을 읽는 독자는 아직 소수의 오피니언 리더다. 일본 출판사가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마중물이 필요하다. 쿠온 혼자서는 힘들다. 한국과 일본 정부 및 출판계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길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일본 독자들은 길을 내면 잘 따라온다. 일본 출판계 역시 1990년대에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중이다. 세계적 현상이다. 큰 출판사는 점점 힘들어지겠지만 오히려 내고 싶은 책이 있고 약간의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은 재밌게 할 수 있다.”

2007년 출판사를 만들고, 2015년 책거리를 열었다. 서점을 낼 때 모두 반대했다. 15평(약 50㎡) 규모의 매장에 4000여 권의 책이 있다. 이전엔 저자를 초청해 독서회를 열려고 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지금 서점에서는 1년에 120회 이상 행사가 열린다. 진보초를 알리는 이벤트도 열었다. 100년 이상 된 서점 주인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자리다. 그간 교류가 없던 서점 주인들끼리 송년회를 하기도 했다. 책거리는 요일별로 점장이 다르다.

인터뷰에서 김 대표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장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거기에 두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일본에 소개하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정의롭고 따뜻하게 굴러가길 원하기도 하지만 양국 간 정치적 갈등이 심하면 서점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살길을 찾는 것이다. 한국 작가를 초청해 일본의 유명 작가와 만나는 행사를 주선하는 이유도 한국 문화와 한국 작가가 알려져야 책이 팔리기 때문이다. 쿠온이 박경리 작가의 〈토지〉 전권을 내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작품 자체도 좋지만 출간 목록에 〈토지〉가 포함될 때의 무게감을 고려했다. 그는 장사꾼으로서의 정체성과 약간의 사명감, 즐거움 등이 균형감 있게 배합되어야 일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월20일 김승복 대표는 서울 합정동의 독립서점 ‘땡스북스’에서 북토크를 열었다. 이번엔 번역가로 섰다. 자신이 번역한 〈서점의 일생〉 출간을 기념해 한국에 들른 참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책방 가케쇼보의 11년 생이 담긴 책이다. 책을 파는 일과 관련된 실패담과 경험기가 담겨 있다. 작은 서점이 유행인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조금 번역해 한국의 출판사에 제안했다. 거절당하자 조금 더 번역해 다시 제안하길 반복했다. 김승복 대표의 핸드폰은 최신형 아이폰이다. 기자의 노트북 기종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유행에 민감한 건 호기심 때문이다. 그 호기심이 출판계로 그를 이끌었다. 가는 길마다 처음이었다. 김 대표가 그날 자리한 사람들에게 조언했다. “나더러 황무지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구어나간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잘해서가 아니라 남이 안 한 걸 해서 주목받은 거다. 남이 안 한 걸 하시라.”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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