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바라나시에 ‘구미코 하우스’라는 곳이 있다. 인도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가 운영하는 싸구려 숙소다. 일본인 여행자 미즈키를 만난 건 구미코 하우스의 도미토리에서였다. 지독하게 더럽고, 묘하게 편안한 그 숙소에서는 다 같이 누워 발가락을 까딱이며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사실 이 집의 장점은 그게 다였다. 시간이 솜털처럼 끝없이 이어지리라 믿었던 시절이기에 가능한 여행이었다.

어느 날 미즈키가 말했다. “환타, 일본에 와보고 싶지 않아?” “일본? 거기 너무 비싸잖아. 내가 돈이 어딨어. 돈 있으면 여기 이러고 누워 있겠니?” “일본이라고 다 같은 데가 아니야. 오키나와라는 데가 있어. 거긴 일본이지만, 꼭 여기 같아.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그러면서 미즈키는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줬다. 민중가요풍의 일본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키나와를 돌려다오(沖繩を返せ)’라는 노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72년까지 오키나와는 미군의 손에 있었다.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기지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땅이 일본에 반환되면 미군이 물러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초반 오키나와 사람들이 왜 본토 복귀운동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 후 일본에 반환되고 나서도 미군기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요즘은 ‘오키나와에게 돌려다오(沖繩に返せ)’로 개사해 부른다.

ⓒGoogle 갈무리일본 본토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오키나와 분위기도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역사적 맥락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저 일본이면서도 인도의 바라나시 같은 곳. 게다가 미국에 저항하는 섬. 나는 순식간에 오키나와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나 오키나와에 가게 되었다. 자로 잰 듯 살아가는 게 일상인 일본인의 이미지와는 여러모로 다른 섬이었다. 시간은 인도처럼 느리게 흘렀고, 사람들은 헐렁했다. 언젠가 즐겨 찾는 식당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일주일에 이틀이나 노는 식당이 영업일에도 또 문을 닫은 이유가 손 글씨로 크게 적혀 있었다. ‘마을 운동회가 있어 이틀간 쉽니다. 내일은 숙취가 심할 거라서요.’ 세상에, 숙취를 예상한 휴업 예고라니. 이건 인도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쓴 가이드북을 읽은 독자들이 많이 항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왜 책에 소개된 식당이 영업시간을 지키지 않느냐는 점이다. 일주일에 사흘이나 쉬는 식당도 여럿 있다. 매년 줄어드는 오키나와 스타일 식당과 바

물론 일본 본토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오키나와의 이미지도 바뀌고 있다. 무엇보다 식당이 그렇다.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아무 때나 쉬지 않는 성실한 본토 사람들이 예쁘장한 인테리어와 일본 본토에서도 먹힐 만한 요리를 내세워 연달아 식당 문을 연다. 그들은 본토의 숨 막힘으로부터 탈출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영락없는 일본인이다. 그 결과 가이드북에 소개할 만한 오키나와 스타일의 식당과 바는 매해 줄고 있다. 올해는 백화점이 두 개나 생긴다. 남국의 하늘 아래 한껏 게으른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 했던 여행자들은 점점 바빠지게 생겼다.

미즈키와는 몇 년 전 오키나와 여름 축제인 ‘피스풀 러브 록페스티벌(Peaceful Love Rock Festival)’에서 재회했다. 내가 책을 쓰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누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인사차 왔다. 우리는 점점 효율성이 지배해가는 오키나와에서 진정 오키나와다운 곳이 몇 군데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다가 헤어졌다. ‘남쪽으로 튀고 싶은’ 나이 든 여행자의 회한이 오키나와 여름 밤하늘에 길게 남았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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