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나라를 제국(帝國)으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의 말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이다.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한 나라로 통합됐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알다시피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을 가리키지만 중국인들은 고구려·백제·신라를 삼한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우리 조상들도 ‘삼한’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어. 삼한이 하나가 된 땅 한국(韓國), 즉 대한제국은 그렇게 성립했어.

알다시피 대한제국은 우렁차게 제국을 선포한 지 단 13년 만에 깃발을 내리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지. 1919년 3·1운동 당시 사람들은 주로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해. 대한제국의 이름이 입에 배기도 전에 망해버렸기 때문이었을 거야. 3·1운동의 만세 소리가 아직 조선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고 있을 무렵, 대한의 이름은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1919년 4월10일 일단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 모였어. 되찾을 나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함이었지. 임시국회라 할 임시의정원이 꾸려졌고 거기에서 국호를 둘러싼 일대 논쟁이 벌어졌어. 신석우라는 이가 ‘대한민국’을 제안했단다.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가져오고 민주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을 붙인 거야. 여기서 여운형이 “망한 나라 이름을 왜 씁니까?”라고 힐난하자 신석우는 이런 기지를 발휘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합시다.” 이것이 통했는지 의정원 의원들 다수의 지지를 얻어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한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어. 북한처럼 “분파 대립에 찌들고 독립자금을 탕진하고 강대국에 구걸 외교를 펼친 반인민적 정부”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고 우리 헌법 전문에 기록된 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제공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형이자 뿌리로 볼 수도 있지. 천차만별의 평가를 일단 접어두고 사실만 얘기해보자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성립된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끝내 독립운동의 깃발을 내려놓지 않았던 조직이고, 별 같고 범 같은 사람들이 만나 조국의 독립을 꿈꾸고, 서로 부대끼면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던 역사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올해로 100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든 사람들, 우리 역사의 첫 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모였던 사람들의 생을 더듬어보려고 해.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쯤 후, 미국의 한인들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 대표 자격을 지닌 독립운동가 한 명이 상하이에 들어왔지. 도산 안창호. 그는 19세기 말 독립협회부터 경술국치 직전의 신민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체의 일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고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사자후를 토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지. 더 이상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졌을 때 고국을 떠나면서 남긴 거국가(去國歌)를 읊조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절로 알 수 있어.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가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들

3·1운동은 ‘나의 사랑 한반도’가 독립 의지로 폭발한 사건이었고, 안창호는 3월1일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지. “가장 신성한 날이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다. 이날은 한두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요 이천만이 만들었고, 소리로만 만든 것이 아니요 순결한 남녀의 피로 만든 날이다.” 그래서일까 안창호는 3·1운동이 낳은 옥동자라 할 임시정부에 헌신했단다. 초대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로 지명돼 사실상 임시정부를 이끌었지만 그는 끝내 임시정부의 최고 지위를 거절했어.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의 명목을 띠고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안창호 외 지음 〈안창호 평전〉).” 그건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가 아니었어.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1919년 5월26일 북경로 예배당 연설)”라고 한 말처럼 그는 서북파(평안도 출신)니 기호파(서울·충청 지역 출신)니 갈라지고 반목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달래고 어루만지면서 실제로 임시정부의 손과 발로 모든 일에 앞장섰던 거야.


ⓒ연합뉴스중국 상하이시 푸칭리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입구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창호 자신은 평안도 출신으로 ‘서북파’로 규정됐지. 서울 출신 윤치호는 안창호를 두고 떠돌았던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악담을 일기에 적고 있어. “(안창호가) 기호인들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을 것 같으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1920년 8월30일).”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1931년 1월8일).” 이 중 윤치호가 직접 들은 얘기는 하나도 없어. 모두 누가 찾아와서 쑥덕거린 ‘카더라’ 방송이었지. 필시 그 악담들을 전해 들었을 안창호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 것 같으냐. 독립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준 일 없는’ 아내와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던’ 아들에게 돌아가버리고 싶지 않았겠니. 도산은 끝까지 버텼다. 동포들에게 ‘저 음험한 평안도 놈’ 소리 듣던 독립운동가는 이렇게 절규했어.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평하고 중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더 애정으로써 대우하는 데 노력합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친 사람들 가운데 안창호만큼 가운데 끼어서 욕을 먹고 뒤통수를 맞은 사람도 드물 것 같구나. “선생께서 우시는 것은 보았으나 노여워하시는 선생을 본 적이 없다”라는 춘원 이광수의 증언에서 보듯 도산은 누구에게도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없었어. 또 세상을 뜨기 전, 이 강력한 일본에 어찌할 수 있겠느냐고 절망하는 청년에게 강렬한 한마디를 남긴다. “낙심 마오.” 높아만 가는 일제의 철벽 앞에서, 고통스러웠던 생이 보람 없는 듯 꺼져가던 즈음에서도 안창호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거야.

우리 역사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우열을 다투다가 서로 원수가 되기 일쑤였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니들 잘났다’ 냉소하고, ‘다 똑같은 놈들이야’로 귀결되는 꼬락서니도 허다했지. 서로 자신을 배신했다고 멱살 잡으며 분통을 터뜨리고, “두 사람만 싸워도 우리나라 놈들은 싸움만 하니 모두 때려죽일 놈들이라 한다”고 안창호가 통탄했듯 “이렇게 쌈박질이나 하니 우린 안 될 거야. 아마”라고 좌절하는 풍경 또한 결코 낯설지 않아. 아주 옛날에도, 일제강점기에도,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래서 도산 안창호의 이름은 들을수록 귀해지고 그가 남긴 행적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는지도 모르겠다.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도산 안창호를 기억하자. 그가 우리 역사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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