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말하자면, 가장 오래 붙들렸던 책이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였다. 무표정한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설핏 보여주는 검피 아저씨가 푸르른 강 위에 쪽배를 띄운다. 동네 꼬마들이, 토끼와 고양이와 강아지가, 돼지와 양과 닭이, 송아지와 염소까지, 태워달라고 조른다. 아저씨는 매번 ‘그래라. 하지만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면 안 된다’라는 단서를 붙인 채 모두 배에 들인다.
녀석들은 검피 아저씨가 금지한 바로 그 말썽을 한꺼번에 부리고 만다. 염소는 뒷발질하고, 송아지는 쿵쿵거리고, 닭들은 파닥거리고, 양은 매애거리고, 개는 고양이를 못살게 굴고, 고양이는 토끼를 쫓아다니고, 토끼는 깡충거리고, 꼬마들은 싸움을 하고, 배가 기우뚱… 모두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린다.
작가 타계 뒤에 큰 울림으로 오는 책
거 봐라, 내가 그러지 말랬지. 좁은 배에서 그렇게 소란을 피우다니, 친구를 괴롭히다니, 내 말을 안 듣다니,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기나 해? 보통 어른이라면 그렇게 야단쳤을 것이다. 버닝햄은 아니다. 펼친 페이지 가득, 배는 기울어져 있고 승객들은 모두 물로 곤두박질치는 장면은 말할 수 없이 흔쾌하고 힘차면서 자유롭다. 카타르시스를 한껏 안긴다. 아무도 야단맞지 않고, 뉘우치지도 않고, 그저 헤엄쳐 뭍으로 올라와 따뜻한 햇볕 아래 몸을 말린다. 아저씨는 말한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자. 차 마실 시간이다. 예쁜 찻주전자에 담긴 차를 마시고 예쁜 접시에 놓인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나니 어느덧 보름달 환한 밤이 되어 있다. 아저씨는 손님들을 배웅하며 말한다. 잘 가거라, 다음에 또 배 타러 오렴.
예전에는 이 그림책이 흔연한 놀이 이야기로 보였다. 답답한 일상에 숨통을 틔워주는 초록 바람 같아서 고마웠다. 다시 보니, 특히 작가가 타계한 뒤에 보니, 그보다 더 큰 인생 이야기로도 보인다. 저 쪽배 같은 삶의 터전에 터질 듯 모여 사는 우리. 하면 안 되는, 하지 말라는 짓을 고스란히 저질러 모두가 발붙일 곳을 잃고 만다. 어쩌면 파멸이나 죽음일 수도 있는 상황. 버닝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뭍으로 올려주고, 몸을 말려주고, 차를 대접해준다. 괜찮아, 이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도 없단다. 이렇게 좋은 시간이 뒤따라오잖아?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어쩌면 버닝햄은 저 위 어딘가에 티 테이블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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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공포 나를 단련시킨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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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각형 모양에 새파랗기만 한 표지. 매혹적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책을 집어 들어 각도를 달리 해보고 빛에 비추고 해야 정체가 간신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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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던 강이가 가르쳐준 삶의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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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먼 우주에 작은 별이 살고 있었어요. 작은 별은 외로웠어요. 그 별 주위에 다른 별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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