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댓글 유형은 ‘현실 부정론’이다. 건강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통계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내가 입원해보니 대기업 임원이라는 사람도 똑같은 병에 걸렸더라”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도 그렇게 집에 돈이 많았는데 어느 날 자살했다” “각자 건강 관리하기 나름이지 현실은 이렇지 않다”라는 식이다. 다른 종류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건강 불평등 문제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건강 불평등이란 말 그대로 건강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뜻한다. 좀 이상하다. 사람마다 키도 다르고 몸무게, 피부색, 머리카락 길이가 모두 다른데, 당연히 건강이 모두에게 평등할 리 없지 않은가. 우리가 ‘불평등’하다고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같지 않다’가 아니라 ‘무언가 옳지 않다’ ‘공정하지 못하다’라는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연에 의한 차이나 어쩔 수 없는 차이보다는, 어떤 사회적·구조적 요인 때문에 생기는 차이를 두고 불평등하다고 말한다. 건강 불평등도 사람마다 혈압이 다르고 체지방량이 다르다는 사실보다는 살고 있는 지역, 학력이나 소득, 자산, 직업 계층 등 사회경제적 집단에 따라 건강 수준에 체계적 차이를 보이는 ‘문제적’ 현상을 지칭한다. 한국 사회에서 평균수명이든 자살 사망률이든, 혹은 대사증후군 유병률이든 흡연율이든 건강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연구는 차고 넘친다. 건강 상태라는 게 사회적 요인뿐 아니라 생물학적 요인, 그리고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런 ‘사회적 패턴’에서 벗어나는 예외적 사례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개인들이 주위에서 만난 몇몇 사례를 통해 이러한 통계를 뒤집을 수는 없다.
건강 불평등은 절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도, 원래 그런 것도 아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지만 1940~1950년대 미국의 담배기업 레이놀즈는 ‘카멜’이 의사들이 선호하는 담배라는 점을 집중 광고했다. 아직 담배의 유해성이 밝혀지기 전의 일이다. 이때만 해도 사회계층에 따른 흡연율 차이는 없었다. 의사들도 담배를 많이 피웠고, 담배와 폐암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되었던 1964년 논문도 영국 의사 3만여 명을 10년 동안 추적 조사한 연구였다. 이 연구가 착수된 1951년, 3만여 명의 의사 중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사람은 17.4%에 그쳤다. 담배를 끊었다는 사람은 15.4%였고, 나머지 67.2%는 ‘현재 흡연자’였다. 오늘날 한국 남성 흡연율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이후 담배가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소득이 높거나 학력이 높은 계층에서 담배를 점차 덜 피우고 금연하기 시작하면서, 흡연율에서 뚜렷한 사회적 불평등이 나타났다. 건강 정보에 빠르게 접근하고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환경의 차이가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소아마비 백신이 상품화되었다면···
소아마비의 경우 1950년대 백신이 개발되자마자 대부분의 국가에서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되어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어린이가 접종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이 혁신적 의약품을 상품화하여 경제력에 따라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게 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소아마비의 거대한 불평등을 목격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흥미로운 현상은 비만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넉넉한 몸집은 부의 상징이었다. ‘사장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얼굴 불그레한 배불뚝이였다. 요즘은 다르다. 비만은 부유함이 아니라 빈곤이나 스트레스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기묘한 성별 차이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남녀 모두 사회계층과 비만율이 반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한국은 여성만 그렇고 남성은 여전히 높은 사회계층에서 비만율이 더 높다(아래 〈표〉 참조). 생활습관, 사회경제적 조건, 식이와 운동 환경 등의 변화와 더불어 외모 압력에 대한 성별 차이가 이러한 양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특정 건강 문제의 원인, 예방이나 치료 수단의 특성에 따라 건강 불평등은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그렇기에 이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척 보면 알 수 있는’ ‘당연한’ 건강 불평등은 없다.
건강 불평등이 도대체 왜 문제인가? 모든 사람들이 건강을 인생의 제일 목표로 삼는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건강해야만 행복한 것도 아닌데! 감기 몸살로 열이 나고 온몸이 욱신거리는데 고통을 음미하며 살아 있는 것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건강은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 행복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사람들이 각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잠재력이다. 그렇기에 건강이 불평등하다는 것은 사회적 질서가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지만, 삶의 다른 기회들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기본권의 침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건강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마저 불평등해서야….” 이런 최소한의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사회문제 중에 정치와 무관한 것이 없겠지만, 건강 불평등이야말로 문제의 인식과 공론화, 해결의 모든 과정이 정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예컨대 건강 불평등 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영국의 경험을 살펴보자. 영국은 주치의 제도와 전 국민 무상의료를 특징으로 하는 ‘국립보건서비스’를 1948년부터 시행해왔다. 의료 이용에 비용장벽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건강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1970년대에 커다란 논쟁이 일었다. 연구자들은 집권 노동당의 보건장관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하고, 자문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보건장관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1977년, 노동당의 외곽 조직이자 국립보건서비스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 의사연합(Socialist Medical Association) 총회에 참석해 이 문제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에 따라 보건부의 수석 과학자 더글러스 블랙, 사회학자 피터 타운젠드, 역학자 제리 모리스가 3년 동안 광범위한 자료들을 검토한 끝에 1980년 그 유명한 ‘블랙 리포트’를 출판했다. 국가 차원에서 건강 불평등 문제를 체계적으로 검토한 세계 최초의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영국에 심각한 건강 불평등이 존재하며 이것이 임금, 근로조건, 실업률, 교육과 주거, 교통수단, 흡연, 식이, 음주 등의 사회경제적 격차와 관계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분석 결과에 따라 건강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도 함께 제시되었다. 역사의 장난인 것일까.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에 보수당이 집권하면서 마거릿 대처가 총리가 되었다. 당시 대처 정부는 최악의 실업률 때문에 인기가 급락하고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 불평등 문제를 대대적으로 공표할 수는 없었다. 블랙 리포트는 8월 연휴 직전, 미디어의 외면 속에 조용히 발표되었다. 보수당 보건장관은 보고서의 권고를 다 실현하려면 터무니없는 돈이 든다며 권고안 수용을 거부했다.
영국은 노동당 집권 후 건강 불평등 의제 재론
이후 블랙 리포트에 영감을 얻은 건강 불평등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보수당 집권 기간 내내 한 번도 정책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건강의 변이’라는 중립적 언어로 포장되어 간혹 언급되었을 뿐이다. 공식 무대에서 사라졌던 건강 불평등 의제가 귀환한 것은 1997년 노동당이 집권하고 나서였다. 노동당은 건강 불평등 개선을 전면에 내걸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블랙 리포트의 권고안들을 다시금 검토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스웨덴 역시 1991년 보수·자유당 연정이 선거에 승리하면서 그때까지 추진하던 건강 불평등 문제의 우선순위가 낮아진 적이 있다. 1996년 사회민주당이 재집권하면서 건강 불평등에 대한 연구와 대책들이 다시 궤도에 오르고, 2002년에는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건강 불평등 공중보건 전략을 내놓게 된다.
지금은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이 최소한 ‘레토릭’ 차원에서라도 건강 불평등 문제를 주요 정책의제로 삼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주기적으로 통계자료를 발간하고 건강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연구를 지원하며 법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불평등 세계의 전통적 강자인 미국에서조차 건강 불평등 해결은 국가보건 정책의 총괄 목표 중 하나다.
건강 불평등은 보건의료 체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불평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점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한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세계보건기구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관한 국제회의’에서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관한 리우 정치선언’이 발표되었다. 124개국이 채택한 이 결의는 건강 불평등 문제가 보건부를 넘어서는 범정부 차원의 정책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의지가 중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2012년 5월 제65회 세계보건총회에서는 리우 정치선언의 실행을 담은 결의안이 194개 전체 회원국의 승인을 얻어 통과되었다. 이후 국제적으로 또 개별 국가 차원에서 리우 정치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한국 정부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건강 불평등 문제를 다룬 국내 논문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나 건강증진개발원에서 발표하는 국가통계 자료에도 건강 불평등과 관련한 지표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연구는 연구, 통계는 통계일 뿐, 정부 차원에서 건강 불평등이 정책 의제로 다루어진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2008년 세계보건기구의 종합 권고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건강 불평등 문제를 다루는 세계보건기구 결의안이 여러 차례 채택되었고 이행사항도 점검 중이지만, 한국 정부가 이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는 그저 베일에 싸여 있다. 국제회의에서 내용도 모르고 거수기 노릇만 한 것인지, 도대체 어떤 부서가 이러한 결의안에 서명을 하고 이행과정을 책임지는지 도무지 알려진 것이 없다.
2008년 세계보건기구의 건강 불평등 종합권고안이 나왔을 때는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있던 시절이다. 그다음은 박근혜 정부였다. 이 시기,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불평등은 더 심해졌고, 각자도생의 담론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여기에 건강 불평등 정책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촛불혁명을 거쳐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영국이나 스웨덴에서처럼 건강 불평등 정책에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아직 조용하다. 포용적 복지국가를 내세우며 복지서비스의 사각지대 해소를 이야기할 뿐 모두의 건강권 보장, 건강 불평등 해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책 논의가 없다. 마땅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정치적 의제가 공론장에 오르지도 못하는 이 상황은 한국 사회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19세기 위대한 병리학자이자 사회의학자였던 루돌프 피르호는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의 의학과 다름없다. 사회과학으로서 인간에 대한 과학으로서, 의학은 문제를 지적하고 그 이론적 해결책을 꾀해야 하며, 정치인은 실천적 인류학자로서 그 실질적 해결 수단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건강 불평등 이슈를 둘러싸고, 이보다 더 필요한 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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