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이 재점화된 것은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2월26일, 장자연 9주기를 앞두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자연의 한 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청원이 올라오면서다. 이 청원은 청원 마감일인 3월28일까지 23만5796명이 참여했다. 참고로 2017년 8월19일 공포된 이 제도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백악관의 청원 프로그램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을 따라 한 것이다. 이 제도는 주로 보수 언론이 희화화하고 지식층 칼럼니스트들이 이따금씩 우려의 변을 내놓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위 더 피플이 30일간 10만명의 동의를 요하는 데 비해 청와대가 배나 높은 답변 기준(20만명)을 설정한 것에서 이 제도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고 했던 입안자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불붙인 이 사건의 핵심에 장자연과 같은 소속사 배우 지망생이었으면서 장자연 사건의 주요 목격자인 윤지오가 있다. 그녀는 2009년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 조○○ 전 〈조선일보〉 기자의 성추행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자신을 성폭행한 자들의 명단을 적은 ‘장자연 리스트’가 그랬듯이 윤지오의 증언 역시 묵살되었다. 그녀는 2014년, 배우가 되기 위해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지 10년 만에 부모가 있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서울에서 입은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싸우고 있던 그녀는 2018년 11월27일, 법무부와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장자연 재조사’에 응하기 위해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장자연의 사망 10주년에 맞추어 〈13번째 증언〉(가연, 2019)을 출간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스물한 살 때 만났던 일곱 살 연상의 장자연을 회상하면서, 장씨가 원치 않는 술자리에 나가 술시중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한다. “한 여배우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원했다면 술자리에 가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들 했다. 단합을 위해서, 처세를 위해서라도 술자리 회식은 피할 수 없는 난관이다. 당연히 곤혹스러웠던 그 자리가 더군다나 위약금 1억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장자연과 윤지오가 더컨텐츠엔터테인먼트와 맺었던 계약서에는 두 사람이 대표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때 치러야 하는 독소조항이 그득했고, 이런 불합리한 계약은 연예계의 표준으로 통했다.
“언니와 나는 더 이상 그런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문제는 ‘갑’의 결정 및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조항이 적혀 있는 계약서였다. 모든 권리는 선량한 관계자를 자처하는 ‘갑’ 김성훈에게 있고, 나와 자연 언니는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을’의 의무만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와 언니는 개미지옥 같은 곳에서 노예계약을 했던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장자연의 자살 동기를 소속사 대표와의 불편한 관계, 드라마 촬영의 돌발적 중단, 개인적인 경제적 어려움,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축소하면서 연예계의 구조적인 불평등 관계를 불문에 부쳤다. 그 결과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무수한 성폭행 피의자들이 면죄되는 한편, 똑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지 못했다.
트라우마를 대면하기로 한 두 사람
장자연이 죽고 다섯 달 뒤인 2009년 8월28일, 보조출연 관리업체의 직원과 단역관리 반장 등 11명의 남자들에게 강간과 성추행을 당했던 단역 여배우가 18층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 언니에게 단역 아르바이트를 추천했던 여동생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엿새 뒤에 언니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혹시 이 두 사람의 죽음에 검찰이 8월19일 공표했던 장자연 수사결과 발표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날 검찰은 술자리 접대 등 강요죄 공범 혐의를 받던 수사 대상자 전원을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 처리했다. 경찰 조사에서 줄곧 끔찍한 2차 가해를 당했던 언니는 검찰이 장자연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고 희망의 끈을 놓았을 것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원래는 〈시사IN〉 제601호에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의 〈플라이 백〉(메디치, 2019)에 대해 쓰면서(‘또라이 없는 직장을 만들기 위하여’) 윤지오의 〈13번째 증언〉을 함께 다루려 했다. 박창진 전 사무장과 장자연 사건의 목격자인 윤지오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현격한 힘의 불균형 관계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며,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을 한 지면에 다루는 것은 강등을 당하고 조직의 집단적인 경시에 고통받고 있는 박창진과,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는 윤지오의 고통을 사려 깊게 취급하지 않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고통은 별도의 예우를 받아 마땅했다.
캐나다로 돌아간 윤지오는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서 우울증·무기력증·공황장애·대인기피증 치료를 받았다. 또 박창진도 자살 충동을 간신히 제어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 끝에 두 사람은 트라우마를 피할 게 아니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창진의 담당 의사는 그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지속적으로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창진씨, 피해자가 범죄 현장을 무작정 떠난다고 해서 그게 잊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그렇게 도망가버리면 나중에 후유증을 안고 살아갈 위험성이 큽니다.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문제를 정리한 다음에 마지막 결정을 하시길 바랍니다.” 윤지오가 한국으로 돌아와 증언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책을 쓴 이유도 같다. “사건의 실체가 규명되어 언니를 편히 잠들게 하고 싶었고 나도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채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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