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열린 한 학술회 때 아랍 학자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한반도 분쟁 해결이 왜 그렇게 어렵냐는 것이다. 압박이든 설득이든 대상은 평양 딱 하나인데 왜 실마리를 못 찾는지 의아해한다. 반면 25개국에 달하는 중동의 갈등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해서 한반도에 비하면 훨씬 해결이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한반도 문제가 쉽다는 것은 단견이다. 대륙과 해양의 거대한 힘이 충돌하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환경을 보면 한반도 평화를 단순히 북한 다루기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중동과 비교하면 한반도 문제가 상대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 그럴까? 바로 중동 현대사의 복잡성이 중동의 독특한 정체성 구조와 얽혀버렸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이념 문제가 발단이었다면 중동은 부족·국가·민족·종교 등이 뒤엉켜 정치화되면서 길을 잃은 것이다. 중동 정치 이면에서 작동하는 이 복잡한 정체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14세기 아랍 최고의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은 역작 〈무깟디마(역사서설)〉에서 ‘아사비야(아싸비야)’라는 개념을 집중 조명했다. 이른바 ‘집단 연대의식’ 또는 이를 통한 ‘공동체 의식’ 등을 의미한다. 이븐 할둔은 아랍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직 공동체성이 아랍 사회의 핵심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중동은 부족·국가·민족·종교가 뒤엉켜 정치화되면서 길을 잃었다. 위는 레옹 벨리의 1861년 작품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들〉.

아사비야는 유목 문화의 특성과 이어져 있다. 척박한 사막과 광야에서 살아내야 했던 아랍 유목 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이들에게 물은 곧 생명이었고 핵심 안보 의제였다. 유목민들의 관심사는 새로운 수원지를 찾아내거나 아니면 이웃 부족의 오아시스를 빼앗는 것이었다. 이 의사 결정은 부족 전체의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새로운 수원(水源)을 찾아 나서기 위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을까? 여러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선택을 해야 했을까? 그런 의사 결정 구조였다면 개인의 존재감에 무게가 실렸을 것이다. 사막의 유목민에겐 각 개인의 의견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공동체 내 연장자들의 의견과 지혜였다. 이것이 모든 의사 결정의 핵심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삶의 터전인 사막이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루라도 더 땅에 살았던 이의 경험과 지혜가 절대적으로 소중했다. 바람 한 점 불어와 뺨에 닿을 때 물기를 머금었는지 아니면 마른바람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했다. 이런 능력은 오랜 세월 사막을 오가며 쌓인 연륜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 젊은이들은 어르신들의 방향 지시에 따라 이동하고 물을 찾아내는 일에 집중하면 되었다. 단순히 확대된 부족 공동체의 끈끈함 정도를 넘는 정치적 연대감이 만들어졌다. 장유유서의 질서에 뿌리내린 정치적 공동체, 그 소속감이 곧 아사비야의 핵심이다. 중동의 독특한 정치 문화인 ‘족장 통치’의 배경이기도 했다. 이븐 할둔의 아사비야는 아랍 정치 문화의 속살인 부족주의를 설명하는 데 탁월한 개념이었다.
 

ⓒAP Photo가말 압델 나세르 제2대 이집트 대통령(위 가운데)은 지식인 중심의 아랍 통합 운동인 바티즘을 통치 이념으로 수용해 대중을 사로잡았다.

제1국면:국가의 등장과 아사비야의 충돌

시대가 바뀌면서 아사비야의 개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국가의 등장이었다. 유럽 열강의 오스만 제국 분할로 인해 갑자기 이 지역에 새로운 ‘국민국가’들이 출현했다. 이로 인해 아사비야는 점차 사라지는 절차를 밟는 듯했다.

곧 문제가 불거졌다. 중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국가들은 ‘국가 건설’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국가권력을 쥔 왕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다양한 부족과 종교와 종파의 국민을 아우르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질적 공동체에 속했던 국민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 통치해야 할지 몰랐다. 국민들 역시 난데없이 생긴 생소한 정부에 충성심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가까운 부족끼리 연대하며 정권에 저항했다. 분쟁은 그치지 않았다.

역설이다. 국가의 등장과 함께 점차 약해져야 할 아사비야는, 국가에 대한 반발이 불거지면서 오히려 강해졌다. 인위적으로 생겨난 국가들이 겪는 필연적 부작용이었다. 아사비야는 대중에게 마치 유전자처럼 계승되었다.

마침내 왕실 아사비야와 국민들의 여러 아사비야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집트·이라크·시리아 등 아랍 전역에서 군사 쿠데타가 빈발했다. 이들 아랍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은 부족 단위 저항을 폭압적으로 눌렀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신생 보수 왕정국가는 오히려 강력한 왕실 아사비야로 국내 부족들의 반발을 폭압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해진 듯 보였으나 속으로는 분쟁의 장작이 쌓여가고 있었다.

 

 

ⓒGoogle 갈무리종교 이념에 몰두하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 전투원들.

제2국면:‘가우미야’와 아랍 대의

부족 공동체를 기초로 하는 아사비야는 냉전 시대에 새로운 정체성의 단위와 맞물려 확장을 시도했다. 부족 단위의 자잘한 투쟁만으로는 아랍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기에 좀 더 큰 단위의 결집력이 필요했다. 대표적인 개념이 가우미야(까우미야), 즉 아랍 민족주의다. 아랍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문화적 공동체 의식이었다. 처음 이 개념을 정치에 접목한 이들은 시리아에서 아랍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바트당이었다. 이들은 유럽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놓은 정치 지형이 온갖 모순을 불러왔다는 데 문제의식을 지녔다. 아랍은 스스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사명감을 아랍 각국 대중에게 고취하기 시작했다.

지식인 중심의 아랍 통합 운동인 바티즘을 자신만의 매력적인 통치 이념으로 수용하며 대중을 사로잡은 지도자도 등장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었다. 그는 2차 중동전쟁인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과 싸워 결국 수에즈를 국유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랍 대중은 열광했고 나세르의 영향력은 아랍을 넘어 아프리카와 전 이슬람권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가우미야는 ‘아랍 대의’의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인위적으로 나뉜 아랍을 통합하고, 팔레스타인의 땅을 빼앗은 이스라엘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가우미야에 투신한 정치 세력들은 기존 아랍 정권을 뒤흔들고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이집트 등 가우미야 아랍 민족주의 선도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보수 아랍 왕정국가와 필연적인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여기에 아랍과 이스라엘 간 분쟁이 덧대어지면서 극도의 혼란이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더욱 거세져서 폭력 투쟁으로까지 번졌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검은 9월단’ 테러 사건은 그 절정이었다. 이스라엘 역시 가차 없는 보복에 나섰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동 전역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제3국면:‘움마’의 정치화와 파장

나세르 대통령의 사망과 더불어 가우미야 정체성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뒤를 이은 사다트 대통령은 전임 나세르의 노선을 뒤집어 아랍 민족주의를 버리고 이스라엘과 손을 잡았다. 일단 이집트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국가 우선 노선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가우미야의 대부 격인 이집트가 가장 먼저 숙적 이스라엘과 수교했다는 사실은 아랍 대중을 비탄에 빠뜨렸다. 이후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등이 나세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가우미야를 내세웠으나 별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중동 전역에는 패배주의가 만연했다. 나세르 이후 아랍 지도자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그러나 냉전의 강고한 진영론에 편입된 독재자들은 걱정 없이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1979년은 매우 중요한 해다.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친미 팔레비 왕정은 붕괴되었고 시아파 신정주의를 자임하는 호메이니 정부가 들어섰다. 이란 옆 나라 아프가니스탄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봉쇄의 틀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중동과 서남아시아가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만연했다. 이때부터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권 곳곳의 청년들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다. 거룩한 이슬람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침입한 무신론의 거두 소비에트와 싸우려는 무슬림 청년들은 속속 파키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무자헤딘 운동이다.

무자헤딘 전사들은 지구를 반분했던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와 10년 가까이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소련군은 19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물러났다. 곧 냉전도 해체되었다. 무자헤딘 전사들은 본국으로 귀환했고, 이들은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10년 가까이 이슬람의 보수적 이념을 연마했고, 세계 최강대국과 싸웠던 이들이다. 이들에게 이슬람은 이제 더 이상 문화와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정치이자 삶의 원리가 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무자헤딘의 후예들은 이슬람의 이념이 구현되는 정치를 꿈꾸기 시작했다. 더 이상 혈연 공동체인 아사비야 부족주의로도, 언어·문화 공동체인 가우미야 아랍주의로도 이 땅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다. 가장 초월적인 가치인 이슬람 공동체 ‘움마’ 건설만이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냉전 해체의 주역인 미국을 더는 과거의 반공 동맹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기독교 문명을 앞세워 이슬람을 탄압하는 주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는 가장 극단적인 예였다. 이 흐름은 ‘이슬람국가(IS)’라는 폭력적 극단주의 테러 집단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월적 가치에 기댄 이들의 극단적 신념체계는 합리성과 논리를 무시한다. 국제사회가 힘으로 통제하려 하나 쉽지 않다. 여전히 중세의 움마를 꿈꾸는 과거 회귀 성향의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다시 국가로:‘와타니야’에서 답을 찾다

중동 곳곳에 서구 식민주의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다. 중동 사람들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투쟁을 해왔다. 그리고 그 동력은 정체성이었다. 아사비야, 가우미야를 거쳐 지금은 움마 건설의 구호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배타적 종교 정치체제인 칼리프 국가는 21세기에 가당하지 않다. 시대착오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인가?

결국 제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가 든든히 서는 것 말고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와타니야(와따니야)’, 즉 국가 정체성의 정립이 필요하다. 중동에 만연한 분쟁을 해소하고 평화가 뿌리내릴 수 있는 와타니야는 어떤 나라일까? 식민 세력의 비호 아래 독재자가 전횡을 일삼던 나라가 아니다. 중세적 봉건왕정을 지금 시대에 유지하는 나라도 아니다. 아랍을 하나로 통일하여 세상의 삼분의 일을 장악하겠다는 허황된 나라도 물론 아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폭력과 파괴를 정당화하면서 초기 이슬람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주장하는 종교주의자들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다.

혈연에 집착하는 배타적 부족주의와 허황된 공상적 민족주의 그리고 종교 이념에 몰두하는 근본주의 이슬람과 거리를 둔 나라가 답이다. 국민의 삶의 질을 고민하고, 정파 간 타협을 통해 일단 싸우지 않으며, 자유로운 목소리가 보장되는 나라가 답이다. 여전히 아랍 여러 나라들은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서 내전 아니면 독재, 그도 아니면 ‘실패 국가’들이 보인다. 그래도 답을 알기에 좌절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