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Jake), 제 의견은 이런데 어떻게 생각해요?” “대니(Danny), 그건….” IT 기업 카카오 노동조합과 회사 측의 교섭 장면이다. ‘제이크’는 카카오 인사 담당 최고책임자, ‘대니’는 카카오 노조 사무장이다. 회사에서 영어 이름을 쓰는 카카오는 노사 교섭 때도 영어 이름을 부른다.

4월24일 오후 경기 성남시 오리 CGV 1관. 팝콘과 콜라를 든 네이버 노조 조합원들이 줄을 서 있다. 이날은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네이버 지회(네이버 노조)가 다섯 번째 단체행동으로 〈어벤져스:엔드게임〉을 관람하는 날이었다. 단체행동이란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의 하나다. 이수운 네이버 노조 홍보국장은 “조합원들이 ‘회사가 타노스(〈어벤져스〉에 나오는 악당)라는 뜻이냐’고 하더라(웃음)”고 말했다.

IT 업계에 지난해부터 연이어 노동조합이 생겼다. 2018년 4월 네이버(조합원 비율 25~30%, 계열사 약 8000명), 9월 게임 회사 넥슨(조합원 약 1400명, 계열사 약 4500명)과 스마일게이트(조합원 약 320명, 계열사 약 2100명), 10월 카카오(조합원 수 비공개, 계열사 약 7000~8000명)에서다. 이직이 활발하고 업무가 개인별로 쪼개진 지식 기반 산업은, 대규모 제조업과 달리 노동조합 조직이 어렵다고 평가받았다. 이런 통념에 반대되는 흐름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첫째, IT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조직의 작동 방식이 관료화되었다. 넥슨은 1994년, 카카오(옛 다음커뮤니케이션)와 안랩은 1995년, 네이버는 1999년, 스마일게이트는 2002년에 설립됐다. 현재는 모두 대기업이다.

ⓒ시사IN 이명익네이버 지회는 2월20일 공식 쟁의행위를 시작했다. 아래는 쟁의 63일째를 맞은 오세윤 네이버 지회장.

개발자로 일하다 현재 네이버 노조 전임을 맡고 있는 오세윤 네이버 지회장(36)은 “초기의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수직 관료적으로 변했다. 팀 내에서는 자유롭고 수평적이지만, 서비스 개편이나 분사 같은 중요한 문제는 ‘톱다운’으로 통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두세 달 해왔던 일이라도 위에서 ‘그거 아니야’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노조를 만들어 바꾸자’는 의지를 모으기 힘들었던 IT 노동자들이 고용 안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게임 업계에서 이런 경향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조성원 넥슨 노조 홍보부장(35)은 “프로젝트가 잘 안 되어 종료되고 팀이 ‘폭파(해체)’되면, 팀원들은 일종의 ‘대기발령’ 상태가 되어 회사 내에서 다른 팀으로 가야 한다. 이런 ‘전환배치’가 잘 안 되면 권고사직을 제안받아 회사를 떠난다”라고 설명했다. “직원들도 젊을 때는 다른 데 가서 도전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고 가정도 이루면서 마냥 회사를 옮겨 다니기 어려워졌다. 옮기고 옮겨서 다시 첫 회사에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고용 불안정에 시달렸는데, 프로젝트 실패 부담을 오롯이 개인이 짊어지는 현실에 점점 의문이 들었다.”

둘째, IT 산업에서 노조가 교섭력 강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금속 제조업의 경우, 적은 수의 조합원으로도 컨베이어벨트 전체를 멈출 수 있는 노조의 능력 자체가 회사 측을 압박한다. 이 문제를 둘러싼 최전선이 국내 최대 포털업체 네이버다. 지난해 4월 출범한 네이버 노조는 2019년 4월 말 현재까지도 단체협약을 맺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도 지난 1월 사측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회사 측은 ‘협정근로자’를 먼저 정하지 않고서는 노조의 요구를 논의에 부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협정근로자란 노사 협약에 따라 파업 때도 정상근무를 해야 하는 노동자다. 사측이 보기에, 파업 중이라도 필수로 운용되어야 하는 핵심 직무다.

ⓒ시사IN 이명익차상준 스마일게이트 지회장이 노조의 마스코트인 선글라스를 낀 고양이(풍선)를 들고 있다.

네이버 노조와 사측의 팽팽한 대립

사측은 ‘포털 서비스 유지·관리’ 등의 수행자를 협정근로자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파업 때도 서버 관리 등의 업무자들은 정상 근무해야 한다는 의미다. 네이버 노조는 철도나 항공 같은 필수공익사업(업무를 멈추거나 폐지하면 공중의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경제를 저해하고 업무 대체가 용이하지 않은 사업)도 아닌데 협정근로자를 지정하면 노조가 무력화된다고 비판한다.

양측의 대립이 노조 측 승리로 끝난다면, 즉 파업으로 서버 관리 업무까지 멈출 수 있게 된다면, IT 노조의 교섭력은 강화될 것이다.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강할수록 직원들은 노조에 가입할 동기를 얻게 된다. 이렇게 노조원의 수가 증가하면 다시 교섭력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발생한다. 반면 네이버 사측이 서버 관리 등 핵심업무를 협정근로자로 지정하는 데 성공하면 노조는 교섭력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셋째, 중요한 노동제도가 바뀌면서 노조 설립의 동력이 생겼다. 특히 지난해 7월1일, 300인 이상 기업부터 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되었다.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은 ‘노사협의회(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구성하는 노사 협의기구)’를 꾸렸는데, 여기에 노동자 위원으로 참여하다 한계를 느끼고 노조를 설립한 사례가 있다. 게임 업체인 넥슨과 스마일게이트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 지회장(36)은 “노사협의회 노동자 위원으로 활동했는데,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 이틀을 앞두고 회사가 바뀐 근무시간 제도에 사인하라고 하더라. 불합리한 내용이 있어서 의견을 수렴할 게시판이라도 열어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IT 업계에 ‘포괄임금제’가 만연한 현실도 노조 설립에 불을 붙였다. 포괄임금제란 시간외 노동수당을 급여에 미리 포함해 일괄 지급하는 제도다. 게임 업계의 ‘크런치 모드(게임 출시나 업데이트를 앞두고 고강도 야근을 이어가는 것)’를 방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6년 넷마블 계열사 넷마블네오의 노동자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진 사건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이 피해자는 주당 89시간을 작업하기도 했다.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으로 비로소 노동시간을 측정하게 되면서, 포괄임금제를 그대로 둘 것인지가 게임 업계의 이슈로 떠올랐다. 넥슨 지회와 스마일게이트 지회는 “크런치 모드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모드로 바꾸겠다”라는 구호와 함께 지난해 9월 출범했다.

넷째, IT 업계 밖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흐름이 IT 업계에도 조합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IT 업계의 노조 설립 바람을 이끈 오세윤 네이버 지회장은 만화 〈송곳〉을 보고 노조가 필요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던 중 팟캐스트를 들었다. 파리바게뜨 제빵 기사 임종린씨가 교육수당을 떼인 게 억울해 정의당의 무료 노동상담 창구인 ‘비상구’를 찾았다가, 민주노총 화학섬유산업노조(화섬노조)를 소개받아 ‘화섬노조 파리바게뜨 지회’를 만드는 이야기였다(임씨는 설립부터 현재까지 지회장을 맡고 있다). 파리바게뜨 제빵 기사들은 전국의 프랜차이즈 가맹점에서 한두 명씩 흩어져 일한다. 서로 얼굴도 잘 알기 어려운 구조다. 세대도 20~30대가 주축이다.

ⓒ민주노총 화섬노조 넥슨 지회 제공넥슨 지회는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깃발을 걸고 피규어를 전시했다(위).

오세윤 네이버 지회장 역시 지난해 1월 ‘비상구’를 통해 파리바게뜨 지회와 화섬노조를 만났다. IT 노조의 특성상 파리바게뜨 지회 설립의 경험을 가진 화섬노조 산하로 들어가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2018년 4월 화섬노조 네이버 지회를 결성했다. 물결이 퍼져 나갔다. 넥슨, 스마일게이트, 카카오 노동자들이 IT 노조의 ‘선배’ 격인 네이버 지회를 찾아왔다. 이들도 화섬노조 아래 지회를 세웠다(IT 노조가 화섬노조 지회에 가입하는 데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

이렇게 해서 노동조합의 불모지라는 IT 업계에서 노동이 조직되는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졌다. 신생 노조들은 소속뿐 아니라 활동 방식도 롤모델 격인 네이버 지회 모델을 따랐다. 노조마다 별명이 있다. 네이버는 ‘공동성명(共動成明:함께 행동해서 네이버를 깨끗하게 성장시킨다는 뜻)’, 카카오는 ‘크루유니언(krew union:크루는 카카오에서 직원들을 부르는 말)’이다. 넥슨은 ‘스타팅포인트(게임에서 캐릭터가 제일 처음 서 있는 곳)’, 스마일게이트는 ‘SG(스마일게이트) 길드(온라인 게임에서 형성되는 유저들의 모임이자, 산업혁명 전 노동조합의 원형을 의미)’다. 노조 간부라는 표현 대신 ‘스태프’ ‘GM(길드 매니저)’ ‘운영진’ 같은 표현을 쓴다.  

기존 노조의 이미지를 ‘리브랜딩’하려는 시도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 지회장은 “중학교 때 노동 3권이 뭔지 적으라는 주관식 문제를 푼 이후로 노조가 뭐고 왜 필요한지 교육받지 못했다. 우리 시대에 맞는 노조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고민했다”라고 말했다. 넥슨 지회는 2월13일 활동 보고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금 글을 쓰는 사람은 국어보다 C언어(프로그래밍 언어)를 더 많이 쓰던 사람이고, 조합원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은 친구보다 피규어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모자람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개인의 약점을 연대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연대는 실제로 변화를 가져왔다. 넥슨 지회와 스마일게이트 지회는 각각 지난 3월과 4월 포괄임금제 폐지를 포함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네이버도 노조 출범 뒤인 지난해 8월부터 포괄임금제를 폐지했다. 역시 포괄임금제가 있는 카카오는 현재 노사 교섭이 진행 중이다. 넥슨 지회와 스마일게이트 지회는 전환배치나 인센티브 지급 문제도 일부 개선했다.

ⓒ민주노총 화섬노조 카카오 지회 제공위는 카카오 지회의 2018년 송년회 모습.
노조가 생기면서 달라지는 것들

연대는 계열사 법인을 모두 포괄한다. 네이버 지회는 네이버뿐 아니라 자회사 NBP(네이버비즈니스플랫폼) 등 16개 법인에 대해 교섭권을 갖고 있다. 다른 지회들도 관계사 노동자 전체를 가입 대상으로 한다. 네이버쇼핑 고객센터 운영 등을 맡는 네이버 손자회사 컴파트너스의 경우 출근 시간보다 일찍 조회를 하거나 늦게 퇴근시키면서 수당을 주지 않았다. 노조가 생기자 이런 관행이 없어졌다. 스마일게이트 지회는 교섭권을 가진 5개 계열사 법인과 ‘통합 교섭’을 진행해 단체협약을 맺었다. 기업별(법인별) 교섭이 일반적인 한국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노조 설립이 한국 IT 산업의 역동성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오세윤 네이버 지회장은 반박했다. “수직적 의사 결정보다는 다수의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발현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국 IT 산업이 계속 혁신할 수 있다. 실무자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면 더 좋은 네이버 서비스를 만들어 유저들에게도 기여할 것이다.” 조성원 넥슨 지회 홍보부장은 “자동차를 사고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조도 자동차 보험과 마찬가지다. 노동자로 일을 시작하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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