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는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섬이 아니다. 3~4월부터 10월까지는 배편 예약이 어려워서, 또 나머지 달에는 기상 악화가 잦은 탓에 결항률이 높아서 힘들다. 수없는 시도와 포기를 오기로 치부하고 비로소 11월 하고도 중순에야, 배편의 여유로움을 핑계 삼아 절정에 달한 가을을 찾아 거문도로 떠났다.

여수에서 쾌속선으로 두 시간 반, 도중에 나로도와 손죽도 그리고 초도에 기항한 후 도착했다. 거문도는 크게 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도·서도·고도.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서도와 동도는 거문대교로 이어져 있다. 그중 면적은 서도가 가장 크지만 대부분의 섬 행정과 편의시설은 고도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객선 역시 이곳으로 입출항한다.

세 섬은 도내해라고 하는 해역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천혜의 항만을 만들어냈다.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거문도는 일찍이 어선과 무역선들의 피항지였으며 19세기 말에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김민수거문도등대

녹산·음달산·불탄봉·보로봉(전수월산)·수월산은 ‘서도지맥’을 이루는데, 이는 거문도가 자랑하는 트레킹 코스다. 서도지맥을 종주하려면 섬 북단의 장촌부락에서 출발해 거문도 등대까지 대략 7시간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삼호교를 건너 서도로 들어와 덕촌리 마을회관 옆 동백연립을 시작점으로 하여 거문도등대까지 이어지는 4~5시간 코스를 추천한다.

불탄봉은 과거 일본군의 벙커가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쏜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불탄봉전망대에 이르러 비로소 배낭을 내려놓고 땀에 흠뻑 젖은 재킷을 벗었다. 배낭에는 백패킹 장비가 담겨 있지만 텐트는 없다. 거문도는 다도해국립공원의 남쪽 끝 지점인 데다 마땅한 야영지가 없다. 이런 경우는 실컷 걷다가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 침낭에 비비색만으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하늘을 지붕 삼아 하룻밤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거문도 최고 비경, 수월산 해안절벽

촛대바위는 숲 터널이 끝나고 본격적인 섬 능선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이정표이다. 능선길은 보로봉으로 이어지는 남쪽 해안의 절벽을 타고 흐르지만 안전하게 정비돼 있어 걷기에 편안하다. 가장 넓은 하늘과 바다는 걷는 자의 차지가 되었다.

널찍한 신선봉 위에 올라서자 거문도등대로 이어지는 수월산 해안절벽이 옹글하게 들어찼다. 거문도 최고의 비경이란다. 또 다른 동백 숲을 통과해 보로봉 정상에 섰다가 돌계단 365개를 내려가니 ‘목넘어’이다. ‘목넘어’는 파도가 높으면 양쪽 바다물이 넘나든다 해서 ‘무넹’이라고도 불리며 입구까지는 도로가 연결되고 또 주차장도 설치되어 있다.

ⓒ김민수거문도 해풍쑥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거문도등대는 남해안 최초의 등대로 1905년 첫 등을 밝혔다. 100년 동안 뱃길을 밝혀온 원형의 구 등탑을 철거하지 않은 채 남겨두고 2006년 높이 33m의 육각형 등탑이 신축되었다. 거문도등대는 등탑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멀리 백도까지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녹산등대는 서도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그곳까지 걷고, 등대 산책로 초입의 데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발아래 거문대교가 내려다보이며 건너편 동도의 섬 능선 위로 큼직한 달덩이를 마주한 최고의 안식처였다. 녹산등대 산책로는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장을 시작으로 인어공원을 지나 등대까지 이어지고 다시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와 이금포해변에서 끝난다. 태풍으로부터 어부를 구한다는 거문도 인어 ‘신지끼’의 전설을 형상화한 인어공원과 초도, 손죽도는 물론 맑은 날이면 고흥 팔영산과 장흥 천관산까지 보인다는 녹문정 전망대, 주변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억새밭은 더할 나위 없는 가을 아침을 보여주었다.

거문도에는 자연이 전해준 두 개의 선물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아름다운 풍색이요, 또 하나는 해풍쑥이다. 청정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양질의 흙이 만들어낸 해풍쑥은 항균·면역 효과가 탁월하고, 진한 향에 식감 또한 부드러워 인기가 높다. 해풍쑥은 대한민국 농식품 브랜드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혀 주민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라남도가 마련한 ‘친환경 농업대상’에서 민간 가공·유통 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촌마을 뒤편 구릉은 온통 쑥밭 천지다. “이놈이 보물이여라우.” 밭일을 하던 아낙의 해맑은 웃음을 뒤로하고 서도선착장으로 내려오니 뭍 나들이 가는 주민들이 하나둘 대합실을 찾아들기 시작했다. 

기자명 김민수 (섬 여행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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