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8일은 독일 현대사에서 뜻 깊은 날이다.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Grundgesetz)이 제정된 날인데, 특히 올해는 70주년이다. 기본법은 2차 세계대전의 패배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1949년 만들어졌다.

패전 후 독일은 연합국 점령 지역(서독)과 소련군 점령 지역(동독)으로 분할됐다. 기본법은 연합국 점령 지역에서 탄생했다. 주 의회에서 선발된 대표 65명이 기본법을 논의할 평의회를 구성했다. 독일 정치에서 좌우를 대표하는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에서 각각 콘라트 아데나워와 카를 슈미트가 평의회에 참여해 주축이 되었다.

1949년 5월8일 평의회는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의장인 아데나워는 5월23일 법을 공표했고 다음 날인 5월24일 자정부터 효력을 갖게 되었다. 동독 지역이 참여하지 않은 데다 연합군 점령하의 국가 체제가 얼마나 지속될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헌법(Verfassung) 대신 기본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PA독일 기본법 70주년 기념 행사 모습.
70주년을 맞아 독일 언론은 기본법이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과 나치 시대의 탄생이라는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탄생했음을 강조했다.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마르틴 슐츠 사민당 대표의 발언을 소개했다.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바이마르 헌법이 공화주의 신봉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기본법은 냉정한 현실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바이마르 헌법은 1918년 발생한 11월 혁명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독일 최초의 공화국 헌법이다. 바이마르공화국은 가장 민주적인 정부로 평가받았지만 곧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역설적으로 나치 정권을 탄생시켰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직접선거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선출했다. 대통령에게는 총리 임명권·의회 해산권·긴급명령권이 있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역사학자 가브리엘레 메츨러는 〈슈피겔〉과 한 인터뷰에서 바이마르 헌법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정당들은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타협할 필요가 없었으며 의회에서 타협이 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문제를 해결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의회는 문제가 생기면 조기 총선을 통해 의회를 새로 구성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런 정치적 토양을 바탕으로 나치당은 1933년 제1당이 되었고 히틀러는 총리로 등극했다.

통일 대비한 상반된 조항 담기도

기본법은 새로운 독일이 나치 독일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는 정신 위에 만들어졌다. 기본법은 강력한 대통령을 두기보다 의회를 운영하는 각 정당의 책임을 강조한다. 또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이 선거를 하는 대신 정치인들이 협의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모두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이다. 기본법 제67조는 “연방의회는 총리에 대한 불신임을 오직 연방의회가 의원 다수의 동의를 통해 새로운 총리를 지명했을 때만 행사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제79조는 기본법의 가장 핵심 내용을 수정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독일이 분단된 1949년 제정된 기본법에는 통일에 대비한 두 가지 상반된 조항이 담겨 있었다. 기본법 제23조는 독일 연방에 새로운 주가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규정했다. 제146조는 독일의 통일과 평화가 완성되면 독일 국민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과거의 기본법을 대체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헌법이냐, 동독 지역도 서독 헌법을 따르느냐 하는 논쟁 끝에 독일 정치권은 23조의 방식을 택했다. 동독의 주들이 독일 연방에 편입되었다. 통일 이후에도 기본법은 독일의 헌법 구실을 하고 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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