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더 판다〉는 일종의 우화지만 우리의 불안하고 슬픈 미래를 가늠해보게 하는, 그래서 외면하기 힘든 다소 기이한 만화다.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마지막 장의 제목이기도 한 파더 판다(Father Panda)는 영어 대신 우리말의 ‘판다’의 의미로도 읽혀 재미있다. 결국 돈이 최고의 가치이고 생산성이 곧 구원이자 선으로 인식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작품의 배경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다. ‘임신 가능’으로 판정된 여성들은 정부가 정해놓은 일정한 나이까지 출산을 해야 한다. 남성의 정자 확보가 어려워 민간에서는 인간이 아닌 동물을 이용한 대체 아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름조차 없는 이 책의 여주인공도 안정적 출산율을 보여주는 ‘판다는 좋은 아빠’를 선택해 그곳을 방문한다. 그렇게 선택된 판다는 자신의 정자를 기증받은 여성의 집에서 유사 가정을 이루며 생활한다.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한 작가


사회 여러 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며 판다는 사회문제로 떠오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엄마가 된 주인공뿐 아니라 아빠 판다와 아이 판다는 고유한 개인이 아닌 사회 시스템 속 대체물로만 취급된다. 그런가 하면 대체 프로그램에서도 경쟁자 ‘토끼 아빠’가 존재한다. 우열 사회 안, 그런 왕따 대상끼리도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작가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섬세한 그림으로 마치 동화처럼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독자는 잔혹 동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것이 결코 동화가 아닌 우리의 현실로 느껴져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작품의 도입부는 이 만화의 모든 결말을 예견하듯 다른 색채로 암울하게 그려져 있다. 홀로 어두운 숲속을 거니는 주인공. 마치 감시 사회처럼 노란 조명을 비추고, 달아나는 주인공을 향해 한 유령이 다가온다. 그녀는 힘껏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망쳐보지만 조명은 수많은 눈이 되어 그녀를 옥죈다. 그리고 춤을 추라고 말한다.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다. 이 도입부의 배경음악은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이다.

작가는 주말마다 홈쇼핑의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목소리로만 일을 하고 서로를 가늠한다. 고객(개인)의 이야기(언어)를 기업(시스템)이 사용하는 몇 개의 코드(누락, 오배송, 불량 등등)로 변환시키는 일을 하는 동안, 그런 익명의 바다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를 품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말한다. “개인에게는 이야기가 마치 연기처럼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내가 콜센터에서 100여 명의 고객과 통화한다면, 만나게 되는 이야기의 수는 200여 개 정도가 된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와 개인의 관계를 지워낸 후 기업이 알 수 있고 동시에 명령이 되는 단어 속으로 욱여넣는다. 이런 일들이 기업이 원하는 속도로 이루어지려면 고객도 나도 얇고 가벼워져야 한다. 수량 〈1〉이라는 숫자 뒤에 충분히 가려질 만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시스템 안을 터덜터덜 돌아다니는 풍경, 결국은 시스템으로부터 존재에 관해 답을 제시받고 그 답이 되어주는 것 외에 다른 꿈은 꿀 수 없는 곳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익명 사회. 이미 우리가 SNS에서 충분히 겪고 있는 개인의 소외. 자신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대체 언어로 수렴되는 개인의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파더 판다〉는 벗어날 수 없는 눈동자 아래서 춤을 추어야 하는 우리 미래에 대한 우울한 자화상이다.

기자명 김문영 (이숲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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