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식당에 조금이라도 빨리 체킹하면 개인 평가점수 감점’ ‘점심시간 외엔 양치하지 마라’ ‘컴퓨터 본체는 아래로 내려 내가 모니터를 볼 수 있게 하라’ 등등. 어떤 기업 임원이 직원들에게 지시했다는 근무 수칙이다. 뉴스로 나올 만큼 화제가 되었지만, 실제 회사에서 ‘소시오패스’ 상사의 일상적 업무 지시에 비추어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하루 여덟 시간 동안 회사에 대한 종속을 노동계약을 통해 자발적으로 약속한 노동자는, 인권 침해적이거나 굴욕적인 어떤 지시에도 일단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이 종속노동의 굴레는 벗어던질 수 없다. 그것이 어쩌면 종속노동의 본질일지 모른다. 다만, 우리에게는 노동의 의무를 일시적으로 면할 수 있는 달콤한 제도가 있다. 연차휴가 제도가 그렇다. 휴가란 노동의무가 있는 날에 사용자로부터 노동의 의무를 합법적으로 면제받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는 1년간 80% 이상 출근하면 사용자로부터 15일의 유급휴가를 부여받게 되는데, 이를 법정휴가의 하나인 연차 유급휴가라고 한다.
회사에서 노동자는 언제 어떻게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가? 현실에서 우리는 상사와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미리 그 사유를 고지해야 하고, 업무 관계자들에게 사용 시기를 사전에 반드시 알리는 것이 보통이다.
현실과 달리, 근로기준법은 원칙상 노동자가 회사에 휴가 사용 시기를 청구하는 것만으로 휴가가 성립함을 규정하고 있다. ‘사용자는 연차 유급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한다. 다만,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휴가를 주는 것이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근로기준법 제60조 제5항).’
법률은, 노동자가 청구한 시기에 사용자가 휴가를 부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해당 시기가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사용자가 휴가 사용 시기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한 예외를 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휴가 사용 시기 지정권이 우선하고, 그다음에 사용자의 시기 변경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법률과 달리 현실은 복잡다단하다. 2017년 어떤 노동자가 휴가를 5월2일과 5월4일에 청구했는데, 5월1일(노동자의 날), 3일(석가탄신일), 5일(어린이날)의 징검다리 연휴를 채우는 날들이었다(누가 이날 연차를 쓰고 싶지 않겠는가). 가전제품 수리업을 하던 회사는 연휴 기간에 수리 접수 물량이 많아질 수 있다는 이유로 휴가 승인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휴가를 강행(결근)했는데, 결국 회사가 노동자를 무단결근으로 징계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구체적 휴가 사유 기재할 필요 없어
이 사건의 결론은 근로기준법 제60조 제5항에서의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었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심리하면서 회사의 휴가 승인 거부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노동자가 연차휴가를 사용함으로써 남은 노동자들의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는 ‘일반적 가능성’만으로는 사용자의 노동자에 대한 휴가 사용 시기 변경권이 정당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이 판결은 “근로기준법상 사용자의 연차휴가 시기 변경권은 사업장의 업무 능률이나 성과가 평소보다 현저히 저하돼 상당한 영업상의 불이익을 가져올 것이 염려되는 사정이 있는 경우”로 제한함으로써 노동자의 휴가 사용권을 폭넓게 인정한 의미가 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연차휴가를 신청하면서 사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연차휴가의 사용을 청구만 하면 사업 운영상 막대한 이유가 없는 경우 휴가는 곧바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휴가 사용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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