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의 보편은 무엇이고, 표준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하니 봉준호 감독의 작품 중 〈살인의 추억〉(2003)에서 송강호가 동료 김상경을 성범죄 용의자로 오인해 발차기하며 외친 말이 떠오른다. 아마 한국 영화사에 가장 유명한 대사일 테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비극적이게도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보편과 표준은 ‘강간의 왕국’이다.‘가해자는 일상으로, 피해자는 병원으로’ 가는 사회
며칠 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 대해 ‘재수사’를 권고하지 않기로 했다. 2009년 검찰과 경찰의 부실 수사와 〈조선일보〉의 외압 사실을 밝혀냈지만 재수사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장자연 리스트 사건, 김학의 성범죄 사건, 버닝썬 사건을 통칭하는 이른바 ‘장학썬’ 사건 중 유일하게 구속된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와 건설업자 윤중천은 여전히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문제를 제대로 보도해야 할 기자들이 오히려 성범죄 대상이 된 여성의 신상과 사진을 적극적으로 공유해온 사실이 밝혀졌고, ‘버닝썬’을 그저 낄낄거리는 소재로만 인식한 사람이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승리의 ‘황금폰’을 부러워하던 가수 지코는 버젓이 대학축제 무대에 섰고, 정준영과 단톡방에서 불법 성관계 동영상을 함께 본 가수 용준형은 ‘무사히’ 입대했다. 전 남자친구로부터 디지털 성범죄 협박을 받은 가수 구하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반면 그 ‘최종범 사건’의 가해자 최종범은 새로운 헤어숍을 오픈하고 파티를 열었다. 가해자는 일상으로, 피해자는 병원으로. 참 대단한 한국 사회다.
법, 언론,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망라한 성범죄 카르텔이 한국 사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확인되었는데도 이들은 왜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들의 우정, 사회관계, 권력 유지를 위해 여성을 선물로 교환하는 문화와 산업이 ‘범죄’가 아닌 보편이기 때문이다. 그저 일부 남초 사이트나 ‘반페미니즘’ 성향의 남성들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이들 사이에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더는 ‘일부’의 문제일 수 없다. 합법적으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사회는 그게 표준이 되고, 수많은 남성들에게 ‘그래도 된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강간의 왕국’이라는 말이 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장학썬’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라.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말이 보편적 상식과 표준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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