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6872명, 부상자 1만768명. 인구의 50%에 해당하는 1500만명이 기아 위기. 2015년 이후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아동 수 8만4700명. 2014년 발발한 내전으로 아라비아반도 최남단에 있는 예멘은 전쟁터가 되었다.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사나와 함께 예멘인들의 삶도 무너졌다. 예멘인 300만명이 징집과 공습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중 561명이 2018년 제주도에 입국했다. 예멘에서 제주공항까지, 1만㎞가 넘는 긴 여정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단 두 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비로소 눈앞에 나타난 ‘난민’에게 한국은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1년, 한국 사회는 ‘8000㎞를 날아온 낯선 질문’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시사IN〉은 출도 제한이 풀려 각지로 흩어진 예멘인을 만나 그들의 1년을 돌아봤다.

 

 


 

와츠앱 메신저를 열자 1897개의 알림이 떠 있었다. 알리 씨(37·가명)가 엄지손가락으로 채팅방을 눌렀다. 아랍어로 쓰인 메시지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현지 상황을 공유하는 채팅방에 어제오늘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 쭉 나열돼 있었다. 그는 일일이 메시지를 읽는 대신 화면 하단의 화살표를 누르고 채팅방을 나왔다. “거기에 내 친구나 가족이 있을까 봐 잘 열어보지 못해요.” 2016년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과 후티 반군의 공격을 받고 조카와 친구가 사망했다. 5월16일에는 수도 사나의 한 건물이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다. 메신저가 평소보다 더 시끄러웠다. 누군가 폭파된 현장에서 찍어 올린 사진 가운데 온몸에 잿더미를 뒤집어쓴 아이 다섯 명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알리 씨의 엄지손가락이 빨라졌다. “이래서 내가 이 채팅방 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니까요.”

전쟁으로부터 8000㎞를 도망쳐왔지만 전쟁은 그의 손에서 여전히 울렸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이 아직 예멘에 남아 있어서 채팅방을 완전히 나오지 못한다. “중요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때마침 ‘카톡’ 알람이 울렸다. “내일은 4시 반입니다.” 알리 씨의 팀장이 출근 시간을 공지하는 메시지였다. 알리 씨는 능숙하게 “예” 하고 답장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건설 현장에서 안전망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18년 10월18일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뒤 경기도 기흥으로 올라와 찾은 일자리였다. 5월19일에는 서울시 강서구의 오피스텔 건축 현장으로, 5월20일에는 전북 익산의 공장 부지로 일터가 매번 바뀌는 식이다. 한국인 2명, 예멘인 2명이 팀을 이뤄 5m부터 40m짜리까지 미리 설치된 철근 구조물 위에서 초록색 추락방지망을 층별로 고정한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한 망 설치가 6시간 동안 이어진다. 그러고 나서 점심시간을 포함해 1시간을 쉰다. 라마단 기간에는 따로 점심을 먹지 않고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시사IN 윤무영알리 씨는 말레이시아를 통해 제주에 왔다. 경기도오산을 거쳐 현재는 경기도 용인에 산다.
예멘에서 용인까지 그가 이동한 거리는 총 1만127㎞이다.


알리 씨는 말레이시아를 거쳐 2018년 5월2일 제주에 도착했다. 출입국·외국인청의 연계로 한 양식장에서 3개월간 일했다. 양식장 옆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가 숙소였다. 그해 8월 태풍 ‘솔릭’이 왔을 때 밤새 숙소가 흔들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적도 있다. 그곳에서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을 쉬었다. 물고기 밥을 주고, 수조에 있는 물고기들을 옮기는 작업을 종일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졌다. “쉬는 날에도 물고기 밥을 줘야 해서 양식장을 지켰어요.” 그렇게 받은 월급은 160만원이었다.

그에 비해 현재 직장은 주 6일을 일하고 월급도 80만원이 더 많다. 일이 위험해서다. 얼마 전에는 손이 미끄러져 2m 높이에서 떨어졌다. 허리를 다쳐 한동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알리 씨는 한국어로 “이제 괜찮다”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도 벌써 7개월째다. 예멘인들 가운데는 여러 일터를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비교적 빨리 정착했다. 더 이상의 변화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잘리지만 않는다면’ 일을 계속하고 싶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요. 제가 예멘에서 하지 못했던 것이거든요.”

“전쟁이 끝나도 예멘으로 갈 수 없어요”

그는 예멘에서 공학과 법학을 전공한 뒤 공화국 수비대(Republican Guard) 군인으로 일했다. 공화국 수비대는 2012년 물러난 살레 전 대통령이 창설한 군이었다. 2015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에 위기가 닥쳤다. 후티 반군은 예멘군의 본거지를 찾아다니며 공격했고, 예멘군은 공화국 수비대를 전 독재정권의 유산으로 간주해 군으로 복귀하는 이들을 탄압했다. “전쟁에 나가서 죽거나, 예멘군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였을 거예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예멘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참전하지 않은 군인은 예멘 군형법상 사형에 처하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알리 씨는 인터뷰 내내 이름과 얼굴을 가려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저와 관련 있다는 게 들통 나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요.”

한국에 온 지 1년. 그동안 한국어 이름도 생겼다. 제주 ‘사마리안들’에서 만난 한국인이 그에게 ‘진호’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올해 3월부터는 일요일마다 수원 이주민센터에서 2시간 동안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수업이지만 최근 경기 지역에 살고 있는 예멘인이 늘면서 함께 듣는다.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어요.” 제주와 서울에서 수차례 진행된 난민 반대 집회를 확인하며 그는 당황스러웠다. 전쟁을 피해 도망쳐왔지만 설명할 새도 없이 ‘가짜 난민’이나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주변 나라들은 이미 난민 포화상태였어요. 우리에겐 다른 나라를 선택할 권한이 없었어요.”

그가 예멘을 떠날 때쯤 태어난 둘째 딸이 벌써 세 살이 되었다.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후티 반군에게 신분이 노출되면 가족에게 위협이 될 수 있어서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한다. 최근에 받은 연락에서는 두 딸이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후티 반군이 물과 전기를 끊고 있어요. 후티 반군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에요. 내가 버는 돈 대부분을 예멘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요.”

2주일 전에는 그의 가족이 머무르는 숙소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알리 씨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와츠앱 채팅방에 들어갔다. 쏟아지는 메시지와 아수라장이 된 사진들 사이에 아는 얼굴은 없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가족들을 어디로든지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알리 씨는 하루에 다섯 번 아이와 아내가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며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8000㎞ 떨어진 이곳에서 그는 가족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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