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후인 3월1일 새벽,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전날 오후,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최선희 부상이 묘한 발언을 했다. “수뇌회담을 옆에서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좀 이해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자세히 뜯어보면 이상한 대목이 눈에 띈다. 우선 최선희 외무성 부상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매우 피동적으로 묘사했다. “수뇌회담을 옆에서 보면서”라는 표현이 그렇다. ‘나는 담당자가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더욱이 북한 체제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 존엄이자 무오류성의 상징이다. 그런 ‘수령’이 다른 일도 아닌 북·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미국식 계산법을 이해하지 못해 힘들어했다”라고 외무성 부상이 발언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같은 최선희 부상의 돌출 발언에 대해 당시 〈시사IN〉과 통화한 대북 소식통은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날리기 위한 북한 외무성의 고도의 외교적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최선희 부상이 소속된 외무성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암시였다. 실제로 하노이 회담 결렬은 통전부의 전횡에 대해 노동당 내외에서 부글부글 끓던 불만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사IN 이명익2월26일 김정은 위원장이 베트남 동당역에 도착해 특별열차에서 내리고 있다. 뒤편에 김영철이 보인다.
통전부는 1970년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동당 조직비서로 임명되면서 만든 대남공작 부서다. 그전까지 인민무력부 작전국과 적공국(적군와해공작국)이 주도하던 대남정책을 김정일 위원장 휘하의 노동당 조직부 산하로 집중시키면서 대외조사부(35호실), 사회문화부(대외연락부) 등과 함께 통전부를 조직했다.

통전부는 1990년대 사회주의권 붕괴로 북한 경제가 어려움에 처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남 선전이나 심리전 등을 담당하던 한가한 조직에 불과했다. 통전부가 화려하게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북한의 경제난을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경제력을 이용해서라도 북한 경제를 회생시키자는 전략 덕분이다. 통전부 간부 출신으로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장철현은 2007년 이 연구소가 간행한 특별보고서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 해부〉에서 이를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으로 규정한 바 있다. 통전부가 당시 남한의 돈과 식량, 물자 등을 통한 북한 체제 살리기에 앞장서면서 가장 실적 좋은 노른자위 부서가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특별보고서에는 통전부의 ‘사업 작풍’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남북 협상에서 남측은 대화를 하지만 통전부는 대적(對敵)한다. 적과 싸운다는 의지와 결심으로 협상에 임한다. 통전부의 이념적·제도적 원칙이다.”

하노이 회담까지 통전부가 주도한 대미 협상을 이만큼 잘 표현한 문구도 없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남북 협상’을 ‘북·미 협상’으로 바꾸면 통전부의 협상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통전부 시각에서 미국은 대화 상대가 아니라 대적 상대일 뿐이다. 책략을 써서라도 무너뜨리고 이기는 게 중요하다. 대미 협상의 실무 브레인 구실을 했던 김성혜가 통전부 통일책략실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는 것 자체에서 통전부의 그런 인식이 드러난다.

ⓒEPA리용호 외무상(오른쪽)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왼쪽)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통전부, 어설픈 책략으로 하노이 회담 망쳐

하노이 회담을 준비하며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특별대표)와 김혁철 외무성 특별대표의 실무 회담은 이 같은 ‘책략’의 결정판이었다. 김혁철 특별대표는, 김영철 통전부장이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대미 협상 라인에서 ‘제끼기’ 위해 특별히 데려온 인물로 평가된다. 외무성 출신이지만 국무위원회에 소속돼 있던 김혁철을 지난 1월17일 방미 당시 미국 측에 비건 특별대표의 파트너로 소개한 사람이 김영철 통전부장이다. 비건 특별대표는 당시까지 북한 측 협상 파트너가 누군지 몰랐다. 북한은 과거 대남 협상에서도 북측 협상 대표가 누군지 오리무중의 상태로 시간을 끌어 한국 측 파트너의 애간장을 태우곤 했다. 이런 북한 측의 책략은 김영철 통전부장의 방미로 2월 말에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결정한 뒤 절정에 달한다. 당초에는 판문점에서 2월4일 북·미 실무회담을 열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일방적으로 일정을 계속 미룬다. 2월4일로 예정됐던 회담이 2월5일, 6일로 미뤄지다가 마지막엔 장소까지 판문점이 아니라 평양으로 변경됐다.

이 같은 외교적 무례에도 불구하고 비건 특별대표가 순순히 따라오자 북측의 오판이 시작됐다. 미국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든 하노이 회담을 성사시킬 것으로 보았다. 애초에 예상되던 협상 조건을 철회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대신 내밀었다. 즉, 당초 유력했던 협상 조건은 북측이 ‘영변 플러스알파’를 내놓으면 미국은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개설, 남북 경협 등을 내놓는 패키지 딜이었다. 북측은 영변 플러스알파에서 ‘알파’를 빼고 ‘영변 핵시설’만 내걸었으며, 이를 ‘관철시켰다’라고 오판했다. 실제로는 관철이 아니었다. 비건 특별대표가 ‘핵 시설 리스트 제출과 신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6월3일 ‘강제 노역형’설이 나돌았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오른쪽 원)이 김정은 위원장(왼쪽 세 번째)의 공연 관람에 배석했다.
통전부 보고를 믿은 김정은 위원장 역시 사흘에 걸친 ‘위험천만한’ 대륙 종단 이벤트를 감행했다. 하노이 회담 결과가 나온 뒤 몇몇 전문가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승리감에 젖어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 발표라도 했다면 더 큰 낭패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노이 회담은, 통전부가 남북 회담에서나 통할 어설픈 책략으로 자신들의 ‘수령’을 위험천만한 상황에 빠뜨렸던 대실패작이었다.

북·미 협상 과정에서 소외됐던 북한 외무성으로서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외무성 측이 “통전부가 외교를 알긴 아나?”라고 반응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통전부에 대한 외무성이나 노동당 국제부의 반감은 하노이 회담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당 경제부처럼 외교와 무관한 부서 역시 통전부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노동당 경제부의 한 인사는 “통전부는 남북관계에 차단봉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자들”이라며 “만나고 싶지도 않다”라는 반감을 그에게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통전부가 대남·대미 관계의 최전선에 등장한 계기는 미국 중앙정보부(CIA) 내 코리아미션센터(KMC) 신설이다. 2017년 5월 CIA는 한반도 문제를 전담하는 KMC를 새로 만들었다. 북한 정보기관의 수장이기도 한 김영철 통전부장이 당시 폼페이오 CIA 국장에게 내놓은 제안에 따라 북·미 간 정보기관 채널이 구축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서훈 국정원장이 합류해 남·북·미 채널로 확대됐다. 지난해 4·27 남북 정상회담은 이 채널의 작품이다.

통전부의 ‘오버’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다른 부서나 조직의 영역을 침범하는,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먼저 4·27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 경협의 물꼬가 트일 것으로 예상되자 통전부 내에 경제 사업을 담당하는 조직을 신설하려고 했다. 원래 남북 경협 및 교류는 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이나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아태 평화위(조선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등 통전부 외곽 조직이 담당한다. 통전부는 이 조직들을 감독하는 기관으로, 직접 남북 경협 사업을 담당하는 기구는 아니다. 통전부가 직접 나서겠다는 것은 감독이 선수로 뛰겠다는 얘기와 같았다. 노동당 경제부(부장 오수용)가 묵과할 리 없었다. 통전부의 이런 움직임은, 대미 관계 주도권을 빼앗긴 외무성이나 노동당 국제부로서도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AP Photo한성렬 전 외무성 부상(아래)은 지난해 4월 숙청됐다.
대일 관계와 대중 관계를 둘러싸고 마찰이 빚어졌다. 대일 관계에서는 외무성에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담당(송일호 대사)이 있는데도, 통전부가 일본과 별개의 채널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전부가 담당하는 조총련 조직을 통해서다. 대중 관계에서도 말썽이 빚어졌다. 지난해 5월7일 다롄에서 열린 2차 북·중 정상회담 이후 중국 관광객뿐 아니라 조선족 사업가들의 방북이 많아지리라 예상되자 통전부가 관여하기 시작했다. 조총련과 마찬가지로 조선족도 통전부 관할이라고 주장하며 북한 방문 시 신고하라고 한 것이다. 조선족 사업가들이 중국 당국에 ‘우리는 중국 공민인데 왜 북한 측 통전부에 신고해야 하는가’라고 질의하면서 중국 외교부가 북한 외무성에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리수용 노동당 국제부장이 나서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기 때문에 통전부가 아니라 외무성의 대상’이라고 해명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하노이 회담 이후 노동당 내외에서는 ‘통전부 해체’까지 거론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통전부에 대한 북한 내부의 반발이, 최근 국내 일부 언론이 제기한 하노이 회담 주역들에 대한 처형, 강제 노역, 정치범 수용소 감금설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우선,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 내에서 진행돼온 사후 처리 과정에 대해서는 북측 당국자들을 직접 접촉한 대북 소식통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3월 중순 김정은 위원장 주재 아래 노동당 비서와 부장들이 참석한 하노이 회담 관련 정치국 총화가 열렸다. 총화에서 노동당 국제부와 경제부 등의 당 간부들은 김영철 당시 통전부장을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통전부가 대미 사업을 못해 장군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영철 통전부장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납작 엎드렸다고 한다.

통전부장에서 해임된 김영철, 집에서 요양

다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영철 통전부장을 어딘가로 보내거나 하는 조치는 없었다. 대신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인사발령 때 그를 통전부장에서 해임하는 수준으로 일단 마무리되었다(노동당 부위원장 직책은 명예직으로 유지). 이처럼 인사 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 그를 다시 강제 노역형에 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뒤 김영철은 간과 신장 등 건강 문제로 집에서 요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언론에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가 나오자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한 행사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 건재를 과시했다.

다수의 대북 소식통들은 김영철 이외에 김혁철·김성혜 등 실무자들에 대해서도 국내 언론이 보도한 ‘처형 및 정치범 수용소 감금’설을 부인하며 ‘근신 중’이라고 알려왔다. 지난 3월 중순 노동당 정치국의 총화에서 통전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면, 그다음 순서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요해하는’ 것이다. 바로 당 조직 지도부의 관련자들에 대한 검열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이 ‘요해 과정’이 3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진행됐다. 하노이 회담 실무 주역들이 검열을 받기 위해 근신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5월 말에 검열이 끝났다면 곧이어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다. 다만 6월 초 현재까지도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내 일부 언론들은 검열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특정 간부들에게 조치가 내려졌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이다.

한국 언론 보도처럼 가혹한 조치를 내리기엔 북한 내부적으로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대미 교섭의 창구로 외무성이 아닌 통전부를 택한 이는 바로 김정은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통전부를 선택한 이유를, 외무성에 대한 그의 불신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외무성 내부의 내밀한 정보를 보고받는 루트까지 따로 갖고 있다고 한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 인사에 따르면, 1990년대 말부터 노동당 대외연락부(간첩 양성기관) 요원들이 외무성에 파견되어 근무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한성렬 전 외무성 부상 사건’은 외무성에 대한 의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유엔대표부 공사로 20여 년간 대미 외교의 산증인이었던 한 전 부상은 귀국 이후에도 외무성 미국 담당 부상으로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지난해 4월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총살형에 처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귀국 이후 주택을 세 번이나 리모델링하는 등 돈 씀씀이가 커 조사해보니 미국 측 기관과 결탁됐다는 혐의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외무성을 통해 미국으로 정보가 유출된다고 의심하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외무성 대신 통전부가 대미 협상 전면에 등장했다.

김정은 위원장 자신이 외무성 대신 통전부를 선택한 데다 회담 과정도 직접 챙겨 실무진에만 책임을 돌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 위원장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이미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3월6일 “수령의 혁명 활동을 신비화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냈다. 또 4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지 않은 것도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북한 고위급 출신의 한 인사는 “평양 내부에도 고도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