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초기 시절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친구들〉(1930)을 썼고, 야심만만한 화가이기도 했던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와 산다는 것〉(1964)을 출간했다. 프랑수아즈 질로는 그 자신이 바람둥이였기에 〈피카소와 산다는 것〉은 ‘폭로’였지 결코 ‘고해’가 아니었다(두 개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멀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일설은 피카소가 유일하게 매달리던 여자로 그녀를 꼽고 있지만, 진실은 그녀가 두 아이를 인질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클린 후탱은 보통교육을 받은 후, 열아홉 살에 토목기술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몽상가로 불릴 만큼 문화 예술에 심취했던 반면, 남편은 뭇 여자에 더 관심을 쏟았다. 철도 건설 현장 책임자로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나선 자클린은 어느 날 남편에게 실망하고 어린 딸과 함께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칸과 가까운 바닷가 마을에서 도자기를 파는 점원 일을 하다가 프랑수아즈 질로가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난 직후의 피카소를 만났다. 자클린은 피카소 사후에 벌어진 복잡한 유산 분쟁 속에서 그의 그림을 흩어지지 않게 간수하고, 13년 동안 피카소를 위한 기념사업에 매달렸다. 그녀는 명문가 출신도 예술가도 아니었기에 정식 부인이었음에도 피카소 관련서에서는 존재감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데이브 젤리의 〈Nobody Else But Me: A Portrait of Stan Getz〉(안나푸르나, 2019)는 스탄 게츠가 1964년에 출반한 앨범 ‘나 말고는 아무도’를 그대로 책 제목으로 삼았다. 재즈에 취미가 없는 독자들은 ‘스탄 게츠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보고도 무덤덤할 테지만, 재즈 애호가들에게는 반갑기 짝이 없는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가 고른 스물여섯 명의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바친 〈재즈 에세이〉(열림원, 2002)에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소설을 읽었고 다양한 재즈를 탐닉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스콧 피츠제럴드야말로 소설(the Novel)이고, 스탄 게츠야말로 재즈(the Jazz)라고 생각하고 있다.”
열세 살 때 생애 첫 색소폰을 갖게 된 스탄 게츠는 열다섯 살이던 1945년에 이미 프로 연주자로서의 “완성체 음악가”가 되었다. 그가 이때 벌어들인 주급 35달러는 아버지의 주급보다 더 많았는데, 곧 70달러씩이나 벌게 되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고, 여성 편력을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재즈 연주자로서 스탄 게츠의 삶은 여느 유명 재즈 연주자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재즈 에세이〉에서 하루키가 첫 번째로 경애했던 쳇 베이커가 그랬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었던 두 사람은 문제가 너무 닮았던 탓에 “처음부터 서로를 싫어했고, 평생 서로를 경계”한 끝에 한 번도 좋은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
시맹(詩盲)을 탈출하는 두 가지 방법
미국 재즈는 주로 흑인음악 전통 안에서만 해석되어온 편이지만, 지은이는 미국 재즈의 기원에는 “‘진지한’ 예술 또는 ‘저항의 음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 뮤지컬과 브로드웨이 쇼”가 또 다른 중요한 기원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재즈 명곡 가운데 많은 곡이 ‘아메리칸 송’이라고 불리는 그것에서 파생되었다. 이런 논리의 확장판이 ‘재즈는 원래 백인의 것’이라는 일부 백인 인종주의 재즈 뮤지션들의 주장이지만, 지은이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다.
미국의 시 전문 잡지에서 이름난 시 애호가 50명에게 ‘당신은 왜 시를 읽는가?’라고 물었다. 프레드 사사키와 돈 셰어는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이 기획의 답변을 모아 〈누가 시를 읽는가〉 (봄날의책, 2019)를 엮었다. 기획에 응해 에세이를 제출한 이들 가운데는 헬렌 피셔(인류학자), 리처드 로티(철학자), 록산 게이(작가), 로저 에버트(영화평론가), 아이웨이웨이(중국 현대미술가·인권운동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언론인), 크리스 헤지스(언론인)같이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인도 있지만, 이름보다는 야구 선수였거나 〈플레이보이〉지의 편집장처럼 특이한 경력이 더 눈길을 끄는 사람도 많다.
이들이 내놓은 에세이를 보면 시가 필요한 이유 혹은 읽는 이유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시는 아무런 효용도 소용도 없지만 “시는 무용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리오폴드 프뢸뤼크)”라고 말하는 견해. 다른 하나는 창의력 확장이든, 위안이든, 행동의 수단이든, 적확한 감정의 표현이든 뭐든, 시는 삶에 유용하다는 견해.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총장을 지냈던 퇴역 중장 윌리엄 제임스 레녹스 주니어는 이렇게 강조한다. “미 육군사관학교가 계관시인을 배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명하게 소통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졸업생들을 키워낸다면, 우리는 군과 이 나라에 더 나은 지도자들을 준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서문을 쓴 돈 셰어의 말을 들어보면, 시가 점차 전문화되어 “요즘 나오는 시들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해지는 것은 한국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포기한다는 고급 독자도 적지 않다. 시맹(詩盲)을 탈출하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재즈 음악에도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장르가 따로 있듯이 “특정 종류의 시가 나와 공명한다는 사실”(마이클랜 피트렐라)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원론적이다. 대니얼 핸들러는 “시가 어렵다고 느꼈을 때는 재미로 시를 읽을 때였다”라면서, 시집은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처럼 ‘용을 써야’ 이해가 되는 것이 시라면, 시의 효용이나 소용이 결코 무용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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