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는 흔히 거시경제학의 무덤이라 불린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하고 부채가 많으면 금리가 높아질 것이라는 결론은 일본에서 맞지 않는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여 돈을 빌리려 하면 국채 가격이 하락하고 금리는 높아진다는 것이 거시경제학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채무 비율은 1990년대 이후 계속 높아져 이제 GDP의 240%에 이르지만, 금리는 오히려 떨어져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여전히 낮은 물가다. 거시경제학은 재정적자가 커지면 인플레이션이 높아지고, 무엇보다도 중앙은행이 돈을 많이 풀면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일본은 재정적자가 심각하고 일본은행이 화끈하게 돈을 푸는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물가가 높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실업률이 떨어지면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예측도 들어맞지 않는다. 지난해 일본 실업률은 전년보다 0.4%포인트 하락한 2.4%로 26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에 그쳤다.
경제학 교과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본의 거시경제는 일본 경제의 특징과 관련이 크다. 오랫동안 지속된 불황과 이에 대응하는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정책이 그 요인이다. 일본은 1990년대 초 엄청난 버블이 터져 GDP의 3배나 되는 자산 가치가 사라진 이후 나타난 장기 불황 및 디플레이션이 20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렇게 장기 불황으로 이어진 소비와 투자의 심각한 침체가 시장금리를 하락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불황으로 성장률이 낮아져 세수가 감소했지만,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복지 지출은 늘어나 재정적자와 나랏빚이 크게 늘었다. 오랫동안 저축을 많이 쌓아온 일본 국민과 금융기관 처지에서 정부의 국채는 안전한 투자처였고 따라서 금리 상승 압력은 낮았다. 지금도 일본의 국채는 약 89%가 국내에서 소화되고 있어 외국인 투자자의 국채 매각으로 인한 경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스 등 재정위기를 겪은 남유럽 국가들보다 국가채무 비율이 훨씬 높지만 일본이 재정위기로부터 안전한 이유다. 게다가 2013년부터는 아베노믹스 아래 중앙은행이 일본 국채를 시장에서 대거 사들여 현재 일본 국채의 약 절반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국채를 매매하며 단기금리와 장기금리를 목표치에 맞추어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있는데도 물가는 왜 올라가지 않는 것일까. 일본은행은 지금도 국채를 사고 있지만, 기업의 투자수요가 미약해 은행 대출은 증가하지 않았고 푼 돈의 대부분은 다시 중앙은행으로 돌아왔다. 결국 우려와 달리 본원통화는 증가했지만 경제의 통화량은 늘어나지 못해 인플레이션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실업률이 떨어져도 임금이 상승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오랫동안 지속된 불황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와 협상력이 약해진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중앙은행이 재정지출하는 ‘헬리콥터 머니’까지 거론
이래저래 신기한 일본 경제. 여전히 물가는 오르지 않고 경제 회복도 미약해서 그 앞날에 관해 의문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앞으로 인구 감소 등으로 명목 GDP 성장이 더욱 낮아져 국가채무 비율이 계속 높아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은행은 과연 언제까지 국채 매입과 마이너스 금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실제로 장기 불황에 맞서는 이단적인 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작년 경제성장률은 0.8%에 그쳤다. 사정이 이러니 이제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재정지출에 직접 사용하는 ‘헬리콥터 머니’나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채의 일부를 상각해버리는 극단적인 구상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거시경제학의 무덤인 일본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거시경제학을 위한 상상력일까. 문제는 최근 다른 선진국들도 일본을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를 앞서간 일본에서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이 등장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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