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로 시작하는 번호가 휴대전화를 쉼 없이 울렸다. 한국의 언론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자 김패위씨(55)는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6월14일에 열린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집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지 이틀 만이었다. “원래 홍콩의 사회운동가 사이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곡이에요. 멜로디가 좋잖아요.”

홍콩 대학 철학박사, 구의원, 대학 강사, 공연 및 프로젝트 기획자.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다양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운동가였다. 1999년 밴드 ‘행동하는 마녀들(Witches in action)’을 결성해 민중집회가 열릴 때마다 초청받아 직접 만든 노래를 불렀다. 그날 이 곡을 택한 이유는 “홍콩 시민들에게 힘을 줄 어떤 노래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고무탄, 최루가스를 쐈어요. 집회를 많이 다녀봤지만 그토록 사람들의 분노가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시사IN 이명익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이 번뜩 떠올랐다. 2005년 12월 홍콩에서 6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자 한국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 900명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홍콩 시내에서 거리 행진을 벌였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수백명이 동작과 구호를 딱딱 맞춰서 행진하더라고요. 대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무되는 느낌이었어요.” 거리 행진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한국어 가사는 잘 몰라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멜로디”라는 걸 단숨에 알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싸울 때 같이 부를 노래가 없었어요. 이 노래가 홍콩의 사회운동계에 큰 귀감이 되었죠.”

사람들에게 이 노래가 좀 더 알려지길 바랐다. 2015년 그는 ‘우산행진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곡을 개사했다. ‘우산혁명’이 끝난 후 홍콩 사회 전체가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때였다. 대학에서 문화학을 가르치던 그는 학생들의 변화를 피부로 체감했다.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와 대화하는 것도 거부했고요.” 김패위씨에게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비탄함을 떨치기 위해 무엇이라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가사가 홍콩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광둥어로 개사했다. ‘(…) 침묵할지라도 초심을 잊지 않으리/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행렬과 다짐의 소리/ 동지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고/ 핏빛으로 물든 깃발은 진흙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빛은 구속할 수 없는 존재/ 다른 동지를 위해 밝게 빛을 비추리/ 세월에 따라 잊혀진 아름다움은/ 산과 바다에서 되찾으리/ 좋은 나날이 오길 믿는다/ 사랑과 꿈이 담긴/ 결코 좌절하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나아가리.’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 광주민주화항쟁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라는 것과, 한국에서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100만 시민이 불렀던 노래라는 것을 항상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제아무리 탄압해도 빛을 완전히 끌 수는 없다고. 새로운 시대가 올 테니 좌절하지 말라고.”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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