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을 맞으며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영도의 수산시험장에서 우치다 게이타로가 주도해 기록한 조선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 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 어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정문기는 〈한국어도보 (韓國漁圖譜)〉(1977)에서 우치다에게
이 자료의 사용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치다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나 ‘물고기’에 관한 지식이 식민지 학지에 의존해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현장’에 밀착해 조사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우치다는 현지 조선인의 지혜를 공유했지만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의 관료와 식민지 조선인 사이에 놓여 있는 위계적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노출한 것이다. 즉, 한반도 각지의 현지 조선인이 우치다를 안내하고 여러 현장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답사와 조사는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집합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이들 (해녀·선원·해양기술자·제조업자 등)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이 요긴해진다.

ⓒ김나현 제공평생을 부산 기장군 대변에서 산 박말애 해녀는 지난 4월10일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14년 8월 물질을 하는 박말애씨의 모습.


공교롭게도 우치다가 남긴 기록을 읽은 뒤 국립해양박물관의 해안 데크에 나왔을 때, 영도 ‘해녀’가 숨비 소리를 내며 물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을 식민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지혜를 동시대 우리 삶의 지혜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해녀로부터 바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말애(1956~2019)는 해녀였다. 〈해녀가 부르는 바다의 노래〉(샤인텔, 2014)와 〈파도의 독백〉(샤인텔, 2016)을 남긴 수필가이기도 했다. 지난 4월10일 그녀는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다시는 뭍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해녀가 바다에서 실족사해 죽었다니. 좀체 믿기 어렵지만, 현재까지 그녀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바다가 부르기라도 했던 것일까? 원양어선을 탄 선원들이 저녁까지 잘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아무 흔적도 없이 증발되는 일이 흔했다는 어느 선장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죽음은 ‘세이렌’이나 ‘인어’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박말애의 죽음을 낭만화하고 신비화하기보다 그녀가 남긴 두 권의 수필집을 통해 해녀의 ‘자기 진술’을 귀하게 대접하고 우리 삶의 문맥으로 옮겨놓는 일이 중요하다.

그녀는 평생을 부산 기장군 대변(大邊)에서 살았다. 대변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름을 바꿔달라고 청원해 용암초등학교로 바꾼 바로 그 대변이다. 대변은 대동고라는 창고 근처에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대변항은 동해안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국가 어항이다. 풍어제로 동해안 별신굿이 열리며 멸치축제가 개최되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항구 근처 해녀촌 (대변어촌계 해녀특산물판매장)에서 ‘가성비’ 좋은 수산물을 먹을 수 있어 평소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어촌이다. 그녀는 수필집에서 대변을 반농반어(半農半漁)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대대적인 개발로 농지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저승에 목숨 맡기고 이승에서 일해”

대변에서 박말해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이 제대 후 가족을 건사하겠다고 멸치잡이 배에 올랐다가 풍랑에 배가 난파되면서 다시는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박말애는 바다를 떠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절절하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둘째 언니가 물질을 하다 심장마비로 죽고 장례를 치른 뒤에도 곧장 물질에 나서는 자신을 깨닫게 되면서 앞으로도 바다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저승에 목숨을 맡기고 이승에서 일을 하는 게 해녀”라는 말은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다. 구순에 가까운 노모를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모시면서, 대변 바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모든 고통을 넘는 법을 바다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수필집에는 그녀가 대변 바다를 떠난 때가 짧게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 초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안리에 있던 피복창에 취업하기 위해서였다. 군인들의 상하의와 의류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미싱사로 평생 일할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 이하는 취업할 수 없다는 노동법 규정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다고 한다. 또 한번은 1970년대 후반인 20대 초반 무렵, ‘여공’으로 동래 보세공장에서 일하면서였다. 대변에서 기장역까지 10리를 걸어 기차를 타고 출근하고, 다시 동래에서 기차를 타고 기장역에 내려 10리를 걸어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바다로 돌아오게 된 것은 새벽 5시에 나서 밤 10시에나 돌아오는 노동강도나 노동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해녀 노동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공장에 고여 살기엔 이미 그녀의 몸이 바다와 밀착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흔히 해녀는 제주와 동격이지만, 제주를 제외하고 해녀가 가장 많은 곳이 부산이다. 특히 부산 기장의 해안선은 해녀의 삶과 뗄 수 없다. 2009년 발간된 〈해녀 복지 증진 및 관광자원화〉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당시 부산시 수협 소속 해녀가 437명, 부산동부수협에는 598명, 의창수협에는 24명으로 모두 1059명이 등록되어 있었으며 미등록자도 20%가량이었다. 부산광역시가 발간한 〈2018 수산편람〉의 나잠어업인(맨몸 잠수 어업인) 현황에서는 해녀가 총 93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집계된 수만 보아도 거의 10년간 해녀 121명이 사라진 셈이다. 그런 점에서 척박한 뭍에 바다를 들려주던 해녀의 상실은 바다를 잃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부산 해녀의 역사는 제주 해녀와 이어져 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주 해녀의 이주에서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울산과 부산 기장 앞바다였다. 제주도 여자가 각처로 벌이를 나가는 것은 당초 경상남도 울산과 기장 두 연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보통 어선 한 척에 여덟 명에서 열두 명의 해녀와, 사공과 감독을 겸한 남자 대여섯 명이 같이 탔다. 이들은 보통 6개월 동안 부산으로부터 울산 방면으로 가는 해로의 각 암초 근처에서 벌이를 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1952년 부산 남천동에서 해녀들이 미역을 채취하고 있다.


이후 해녀의 활동이 점점 왕성해져 벌이 나가는 곳도 점점 넓어졌다. “전라남도 소속의 모든 섬, 경상남도 거제도, 부산 근처, 울산 근처, 기장 근처, 경상북도 연해 각처, 강원도 연해 각처, 함경남도 연해 각처, 황해도 연해 각처, 지나(중국) 웨이하이 연해. 그러하나 지나 방면으로 나가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며 아직 시험적 ‘출가 물질’에 불과하더라 (〈매일신보〉 1916년 8월3일).” 부산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던 대원수산조합 (大原水産組合)의 조사를 번역해 실은 연재 기사 가운데 일부이다. 1895년 이른바 첫 ‘출가 물질(외지로 떠나 하는 물질)’을 시작했던 제주 해녀들은 한반도 전 해역은 물론이고 도쿄, 오사카, 칭다오, 다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다. 일본 쪽의 출가 물질은 극성스러웠다고 한다. 이런 활동들 때문에 제주 해녀들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수산업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소르방’ ‘다르방’이라 불린 강계바다의 바위

당시 수산업자와 객주는 해녀들에게 선금을 주고 배 삯이나 식대 등을 고비용으로 책정했다. ‘고리대’를 활용한 방식으로 해녀들을 꼼짝할 수 없도록 장악했다. 또 해녀 객주를 통해서만 해산물을 매매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싼값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다. 즉, 이 시기에 일본인 수산조합과 객주가 공모해 해녀들을 예속화한 것이다. 이 시기 제주 해녀들이 출가 물질에 나갔던 현지에 이주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수산조합과 해녀 객주들로 인해 생긴 채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말애에 따르면 제주도 해녀들이 대변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공식적인 지명이 입말로 남아 있다. 대변항에서 죽성리 방향의 해안도로로 가다 보면, 부산 사람들조차 생소한 ‘강계바다’가 있다. 이곳은 대변 해녀와 어부 그리고 낚시꾼 일부에게만 알려진 이름이다. 이 바다 아래에는 현재 해수 담수화 사업을 위해 대륙붕까지 이어지는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다. 한때 해녀들에게 황금어장이었던 강계바다는 더 이상 물질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박말애에 따르면 이곳 해녀들은 강계바다에 솟아나 있는 해안 바위를 ‘소르방’ ‘다르방’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하르방(할아버지)’에 ‘소’와 ‘다’가 결합되면서 축약된 말로 보인다. 작은 바위는 소르방, 작은 할아버지 ‘신’, 여러 바위는 다르방, 여러 할아버지 ‘신’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을 보호하려는 열망이 제주도식 입말에 투영되어 이렇게 불린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지명은 제주도와 경상도의 어법이 결합된 것으로 이주 해녀의 토착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토착화 과정이란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접속, 충돌해 변이를 경험하면서 현지화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한 번에 완결되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토착화 과정에서 한 문화가 완전히 상실되기도 하고 상호 변용으로 애초 두 문화 자질이 모두 사라지기도 한다. 어촌의 도시화나 관광화가 특히 이런 현상을 가속화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가령 해녀들이 직접 물질로 얻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가게와 해녀들의 물질 없이 저렴한 가격에 사들인 해산물을 판매하는 곳이 이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런 흐름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면, 해녀들의 물질 노동과 자율적으로 만든 규약, 그리고 관계들이 상실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바다에서는 파도에 맞서지 않고 타고 넘어야 한다’ ‘물속을 오르내리기 위해선 테왁과 무게추인 납에 의지해야 한다’ ‘망사리엔 충분히 수확해도 괜찮은 해산물만 담아야 한다’ 등 해녀들이 바다를 아껴 일구는 지식과 지혜 역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뭍에서는 죽은 말이지만, 바다에서는 생존의 말이다.

‘현직’ 해녀 급감은 해를 넘길수록 가속화할 모양새다. 기장의 항포구에는 신규 해녀가 사실상 없다. 해녀 대다수가 60~70세 이상 고령이고 30세 이하는 없으며 30~59세가 44명뿐이어서 부산의 바다 속내를 들려줄 해녀들을 만나기는 점점 어려워질 전망이다. 그러니 해녀들의 바다를 받아 적는 일이 서둘러 이루어져야 한다. 아직은 ‘천 개’의 바다가 살아 있으니 말이다.

기자명 김만석 (독립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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