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진행될 북·미 실무접촉은 먼저 하노이 회담 결렬을 복기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서로의 견해 차이를 재확인하고, 북측이 제안했던 영변 핵시설 전면 폐기와 그에 따른 미국의 상응조치의 디테일을 논의하는 작업이 첫 의제가 될 수 있다. 여전히 영변 핵시설이 쟁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6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내외 뉴스 통신사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 전부가 검증하에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6월30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영변 핵시설 폐기는 비핵화로 가는 입구”라고 추가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문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변에 대한 합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 이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로 나아가는 초기 단계로 볼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과정에서 북·미 핵협상 또한 불가역적인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판문점 남측 자유의집 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

 

 

 


비난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미국 전문가들을 인용한 일부 보수 매체를 중심으로 대통령의 설명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요지는 이렇다. “핵 목록이나 신고가 없는 상황에서 영변 핵 폐기를 핵 프로그램 폐기라고 부를 순 없다(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국 대사).”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첫 단계는 핵 물질 생산 중단과 핵무기 해체이다(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안보문제연구소 소장).”

원론적으로 보자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들이지만, 현실성을 따져보면 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국과 최소한의 신뢰도 구축하지 못한 평양이 어느 날 갑자기 구두로 된 약속만 믿고 모든 핵 능력을 한꺼번에 포기하는 일이 가능할까. 바로 그것이 하노이에서 미국이 제시한 빅딜이었고, 평양이 수용할 수 없는 카드였음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영변 핵시설 폐기와 미국의 상응조치라는 동시 교환을 통해 먼저 성공 사례를 만들고, 이를 통해 신뢰가 쌓이면 영변 이외의 다른 시설, 물질, 나아가 무기에 대한 후속조치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단계적 접근법의 요체다.

물론 북·미 양측이 비핵화 로드맵과 최종 상태(end state)에 대해 먼저 포괄적으로 합의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에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 로드맵의 첫 번째 단계는 영변 핵시설의 검증 해체와 그에 따른 미국 측의 상응조치일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비핵화로 가는 입구’가 의미하는 바다.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모든 시설·무기의 전면 폐기’를 전제조건으로 내거는 일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헤커 교수 “북한 전체 핵폭탄 생산능력의 60~70% 차지”

관건은 영변 핵시설의 가치다. 비판론자들은 이미 시설이 노후화됐기 때문에 협상 가치가 없고, 영변 핵시설 폐기는 불가역적 비핵화의 초기 단계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동전의 다른 면을 보자. 1965년 이래 차근차근 5㎿ 흑연감속로, 핵연료 가공시설, 방사화학 재처리시설, 연구용 원자로, 수소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삼중수소 실험실, 원심분리기 2000개 이상을 가진 고농축 우라늄 생산시설과 연구개발센터 등 300동 이상의 시설·설비를 구축해놓은 핵 개발 종합단지다. 결코 작은 딜이 아니다.
 

2010년 11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변 고농축 우라늄 생산시설을 방문했고 총 네 차례 이곳을 찾았던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 대학 교수에 따르면, 현재 영변에서는 매년 플루토늄 핵폭탄 1개, 우라늄 핵폭탄 3~4개를 생산 중이다. 이는 북한 전체 핵폭탄 생산능력의 60~70%에 이른다는 것이다. 로스앨러모스 무기연구소 소장으로 12년간 일한 독보적인 핵무기 전문가의 분석을 굳이 평가 절하할 필요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영변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미국이 제시하는 동시적·병행적 접근과 북한이 말하는 단계적·동시 행동의 원칙을 함께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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