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구차는 좀체 마을 어귀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제는 조문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을 주민처럼 보이는, 길게는 일주일째 봉하마을에 눌러앉아 떠날 줄을 모르는, 하나같이 피로에 전 얼굴의 지지자들이 운구차를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5월29일 새벽 6시. 막 발인을 끝마치고 영결식을 위해 서울로 향하려던 때였다.

서거 다음 날인 24일 오후,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쏟아졌다. 한 시간 동안 퍼부운 비를 맞으며 많은 조문객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애국가를 대신했던 노래, 2004년 17대 총선 당선자들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에서 나왔다는 그 노래다. 일국의 대통령이 마지막 가는 길에 ‘공식적인’ 애국가 대신 거리의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띄우며, 지지자들은 “내 인생 단 하나의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박자도 음정도 어지간히 엉망이었다. 후렴구 가사가 들리기 전까지는 무슨 노래인지도 알기 힘들었다. 군데군데 흐느낌이 뒤섞여 의도치 않게 돌림노래가 돼버렸다. 노무현을 떠나보내려 6박7일을 함께한 봉하마을의 조문객은, 노래 못 부르는 것마저 그렇게 노무현을 빼닮았다.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 다시 예수를 죽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일주일간, 봉하마을은 그런 공간이었다.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2㎞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들어가는 길은 낮이면 만장이 펄럭이고 밤이면 촛불이 끝도 없이 늘어서는 순례길이었다. 그 길 끝에 ‘순교자’가 있었다. 한 조문객은 방명록에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 다시 예수를 죽였다”라고 썼다. 초지일관한 지지자든 한때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이든 간에, 순례길을 걸어 봉하마을에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노무현이 됐다. 특권을 혐오했고, 권력과 언론과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좌우 모두와 척을 졌다. 필요하면 언제나 자발적 참여로 대응했지만, 신념이 지나쳐 때로 거칠기도 했고, 개인에 대한 애정과 민주주의의 염원을 뒤섞기도 했다. 장점과 단점을 가릴 것 없이, 과연 ‘노무현스러웠다’.

‘비주류 정체성’은 정치인 노무현과 그 지지자를 이어주는 가장 확고한 코드다. 빈소 맞은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빈소에서 노무현을 보내고 돌아선 조문객들은 촛불을 들고 스크린 앞에서 다시 그를 마음에 담는다. 그렇게 순례가 완성된다. 늦은 밤, 삼삼오오 모여든 100여 개 촛불을 상대로, 스크린 속 노 전 대통령이 특유의 사투리 억양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거리의 투사가 했을 법한 얘기지만, 2002년 대통령 출마 연설의 한 대목이다. 마치 선거유세장처럼 “옳소!” 하는 외침과 박수소리 사이로,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흐느낌이 기묘하게 교차한다.

정치인들은 조문객의 거센 분노에 직면했다. 물벼락을 뒤집어쓴 김형오 국회의장.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 유시민 전 장관도 영상 속에서 한마디 거든다. 역시 2002년 대선 당시다. “민주 세력의 적자라는 운동권 출신들이 왜 노무현을 무시할까? 솔직히 말하면, 노무현이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 운동권도 주류다.” 또다시 열광적인 박수. ‘주류’라고 부르는 순간, 적과 아군이 명확해진다.

대학 안 나오고, 영남 출신으로 ‘호남당’에 몸담고, 그 호남당 깃발 틀어쥔 채 부산에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야당 내에서조차 변방이었던 노무현은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조문객에게 ‘나의 대통령’이 됐다. 창원에서 개인 사업을 하다가 “요즘은 그냥 논다”라는 이상건씨(51)는 물통에 옮겨 담은 소주를 기자에게 권했다. 여기 와서는 하루 세 병을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는다며 하소연이다. 그는 서거 당일부터 일주일째 봉하마을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밤을 보냈다. “나도 경기고 나오고 서울대 나와서 우리 사회의 밀알이 되고 싶었고, 그게 안 돼서 큰일을 못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그런 거 없이도 해냈다. 지난 100년에 저런 분 없고 앞으로 100년 동안도 없을 거다. 그러니 이렇게 서민들, 없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 아닌가.” 거의 울먹거리며 말하던 이씨는 빈 물통에 다시 소주를 채우며 기자를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다.

MB·검찰·언론은 ‘봉하 3적’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서거는 ‘비주류의 상징을 기득권 동맹이 살해한 사건’이다. 이명박 정부가 기획하고 검찰이 각본을 썼으며 언론이 집행을 했다. MB·검찰·언론은 ‘봉하 3적’이었다. “미안하다”라는 정서는 그래서 나온다. ‘내가 죽였다’는 수세적 회한이라기보다는, ‘저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는 공세적 자책에 더 가까운 ‘미안함’이다. 한명숙 공동장례위원장도 5월29일 영결식 조사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며 원문에도 없던 표현을 덧붙였다.

조문객에게 막혀 난감한 표정의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위 가운데).
서울에서 일하는 직장인 차영진씨(37)는 5월26일 저녁 7시 버스로 봉하마을까지 내려왔다가 2시간만 머물고 서울로 올라가는 일명 ‘12시간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직장인에게는 더없이 ‘빡센’ 코스인데도 지원자가 몰려 주최 측이 버스를 급히 늘릴 정도였단다. 차씨는 “산소가 있는 곳에서는 산소의 고마움을 몰랐다. 노무현을 지키지 못한 우리 탓이다. 버스 안에서는 ‘누가 죽인 건지는 다 아는 거 아니냐’는 말이 많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잊지 않겠다”라며 칼을 가는 30~40대 화이트칼라 앞에, 노 전 대통령의 유서까지 인용하며 화해를 외치는 보수 언론의 프레임은 먹혀들 여지가 많지 않아 보였다.

기득권 세력의 협공에 ‘내 대통령’을 잃었다는 슬픔은 가장 격앙된 첫 이틀간의 절규로 터져나왔다. 이틀간 곳곳에서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서거 당일인 5월23일, 한 조문객은 방송 카메라에 대고 거칠게 항의하다가, 이를 만류하는 배우 문성근씨를 붙잡고 “오늘 하루만 카메라를 치울 수 있는 거 아니냐.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한테 이게 무슨 무례냐”라며 통곡을 했다.

언론은 특히 분노의 표적이었다. 배우 명계남씨는 “조선·동아 기자들 내 눈에 띄지 마라” 하고 절규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는 장내 방송을 통해 조·중·동 기자의 프레스카드 번호를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은 조·중·동만이 아니라 언론 자체였다. 조문객들은 임시로 마련된 야외 기자실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는 누가 조·중·동 기자인지 알면서 감싸주는 거다. 다 똑같은 것들이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겨레·경향이 뭘 잘했는데? 어차피 검찰 얘기나 받아써서 ‘노짱’ 죽인 건 똑같다”라는 말이 곳곳에서 나왔고, 한 온라인 진보 매체 기자는 조문객이 생수통을 던져 물벼락을 맞았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방송사와 조문객의 승강이는 너무 잦아서 나중에는 취재진의 관심조차 받지 못할 지경이었다. 임기 막판, 기자실 폐쇄 문제를 두고 모든 언론과 전쟁을 벌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을, ‘봉하의 노무현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분노한 조문객들의 타깃은 조·중·동만이 아니었다. 봉하마을에서 쫓겨난 후, 빈소 대신 황소 곁에 중계석을 편 KBS. 논 너머 멀리 봉하마을이 보인다.
정치인은 여야와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불신의 대상이었다. 좌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던 ‘비주류 대통령’ 노무현에게, 조문객들은 한껏 감정이입을 했다. 제도화된 정당보다 ‘노무현’이라는 압도적인 캐릭터에 이끌려 정치의 장으로 들어선 노무현 지지자들은 그 정치적 동원의 통로가 어느 날 사라진 이후, 분출구를 찾아 헤매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갈 전망이다. 모든 정당, 모든 정파가 욕을 먹거나 쫓겨났던 봉하마을의 지난 일주일은 그 단초를 보여준다.

한나라당 인사는 물론이고 현재는 당적이 없는 김형오 국회의장까지도 조문을 거부당했다. 대선후보 시절 ‘노무현 색깔 지우기’에 앞장섰던 정동영 의원은 민주당 출신이면서도 입구에서 막혔다. 첫날 봉하마을을 찾은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조문단은 저지당하지는 않았지만 쓰레기 세례와 함께 “배신자!”라는 외침을 들었다. 진보 정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찬 대표 등 진보신당 조문단은 큰길을 통과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라는 조문객의 외침에 밀려 인파 뒤편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했다. 딱 조문까지만 간신히 허락해준 셈이다. 이들의 뒤통수에 “너거도 노무현이 때가 좋았던 거 인제 알겠제?”라는 야유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이 보낸 조화는 마을을 들어서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서 불탔고, ‘살인자 이명박’이라고 쓰인 손팻말과 메모가 봉하마을을 빙 둘러치다시피 했다. 고인의 유언 중에서도 “원망하지 마라”는 말 앞에서만은, “죄송합니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조문객이 대다수였다.

“내가 말하는 게 노무현 정신 아닙니까?”

빈소 주위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자주 벌어졌다. 명사들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새치기’를 할 때다. ‘봉하의 노무현들’은 이런 사소한 특권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서거 이틀째인 5월24일 오후, 한 조문객이 줄을 건너뛰고 조문하려는 명사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왜 새치기를 합니까? 이 많은 사람이 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장례 진행요원이 저지하자 그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왜 말리는데요? 내가 말하는 게 노무현 정신 아닙니까?” 아마도 그는,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반드시 청산돼야 합니다”라는 노 전 대통령의 2003년 대통령 취임사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3시간을 기다려 300명이 한꺼번에 30초만 조문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노사모 사무국장은 단 15분간의 대화 와중에도 밀려드는 지원 물품을 처리하느라 두 번이나 자리를 비우며, 운구차가 빠져나간 직후 눈물도 채 닦지 못한 조문객이 마을광장에 버려진 노란 종이비행기를 치우는 곳. 대통령 개인의 매력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확신과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대책 없을 정도의 신뢰가 교차하는 곳. “우리가 정의”라는 강력한 자기 확신이 유발하는 명과 암을 동시에 보여주는 곳. 지난 한주간의 봉하마을은 아주 많은 사람이 운영하는 아주 작은 참여정부였다. 그곳에는 노무현 100만명이 있었다.

기자명 김해·천관율·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