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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굴욕사, 정치권에 줄서더니 원장마저 사고 쳤네

2008년 01월 22일(화) 제19호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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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 DJ 정권에서 정치권이 줄을 서라면 일부 국정원 간부는 거침없이 줄을 섰다. 대통령 입맛에 맞추려고 도감청도 불사했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원장이 정보를 유출했다. 국정원의 과거를 추적했다.

   
 
ⓒ뉴시스
‘굽신 만복’이라는 비난을 받는 김만복 국정원장.
 
 
김만복 국정원장의 ‘방북 대화록 유출 사건’으로 국정원이 또다시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자 국정원의 한 중간 간부는 이렇게 탄식했다. “자다가 날벼락 맞은 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월10일까지만 해도 국정원은 국방부와 함께 다른 정부 부처에 비해 평온한 분위기였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 측에서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니 국정원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라는 반응이 나온 터였다. 그러나 조직의 최고 수장인 김만복 원장이 정보맨으로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의 정보 유출 사건을 저질렀다. 말 그대로 정보기관 전체가 수장이 벌인 ‘대형 사고’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직원들 앞에서 입만 열면 탈정치를 강조하던 김만복 원장이었기에 내부의 ‘배신감’과 충격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 원장은 이명박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한 직후부터 당선자의 저서를 일부 국정원 간부에게 돌리는가 하면 인수위 쪽에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집요하게 구애 작전을 폈으나 거절당했다. 정권이 바뀌자 표변한 김 원장의 이런 모습은 대다수 국정원 직원은 물론 일반 국민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건이 터지자 인수위 측에서는 겉으로는 말을 아끼면서도 ‘드디어 국정원을 손볼 기회가 왔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 이명박 당선자가 후보 시절부터 자신이 정보기관의 공작정치 피해자라는 표현을 자주 했기에 국정원 내에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대다수 국정원 직원은 이번 사건을 김 원장 개인 자질 문제 이상으로 확대해 마치 국정원 주요 조직이 정치권에 줄서기를 한 양 해석하는 데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김 원장의 문건 유출로 다시 한번 새 정부의 국정원 개혁이 이슈로 떠올랐지만, 따지고 보면 정보기관이 만신창이가 된 원죄는 한나라당이 집권 시절 저질렀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정권이 정보기관을 사조직처럼 악용하는 폐해가 더욱 심해졌다. 노무현 정부는 이런 역사를 바꾸겠다며 국정원과 거리를 뒀지만 지나치게 방치해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잘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오랜 집권 기간 정보기관의 정치 효용성을 한껏 만끽했던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 새로운 측면에서 정보기관을 활용했다. 국정원 내부 현직 직원의 제보 내지 문건 유출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각종 ‘폭로’전으로 대여 공세를 폈다. 역설적으로 이런 한나라당의 공세는 불법 도청 근절이라는 장치를 이끌어내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결국 새로 들어설 이명박 정부로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과거 정치권이 정보기관을 정치에 줄세웠던 업보를 안고 국정원 조직을 수술해야 하는 시험에 든 셈이다. 만신창이가 된 오늘의 국정원을 이해하려면 그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합뉴스
 
 

1992년 13대 대선 때부터 '줄서기' 시작

대선을 이용해 정보기관 고위 간부급 인사가 정치권에 줄서기한 시발점은 1992년 13대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주자는 노태우 정부 시절 안기부 기획판단국장을 맡았던 황창평씨였다. 안기부 내에서도 대공정책실의 국내정보 수집 및 보고를 담당하는 각 부서 중 가장 센 파워를 자랑한다는 기획판단국 책임자이던 황씨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정치 정보를 직보했다. 이 공로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황씨는 안기부 차장으로 발탁됐고, 이후 국가보훈처 장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안기부에 대한 대대적인 논공행상성 인사를 단행해 편파 인사 시비를 불렀다. 집권 초 국장급 이상 간부는 90% 넘게 영남 출신으로 교체됐다. 그러나 YS는 민주화 운동 시절 정보기관의 사찰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정보기관의 직보와 독대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국 대통령 직속기관인 안기부는 YS 정권 내내 차남 김현철씨와 이원종 정무수석, 그리고 안기부 내 오정소 대공정책실장 ‘3인방’이 쥐락펴락했다.

이때 안기부 내에서 잘나갔던 문제 인물들이 훗날 정보기관의 존폐 시비까지 불러일으킨 정성홍씨(진승현 게이트 당시 경제과장)와 공운영씨(도청조직 미림팀장)였다. 특히 김현철씨는 오정소 실장을 통해 도청 전문가 공운영씨의 미림팀을 운영하고, 정성홍씨를 활용해 검찰과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관리했다. 정성홍씨는 대검에서 청와대로 올리는 핵심 정보보고서(일명 ‘혼보고서’)를 사전에 빼내 오정소 실장의 책상에 먼저 올리는 수완을 발휘해 톡톡히 신임을 받았다.

김현철씨의 사조직으로 전락했다는 말을 듣게 된 YS 정권 안기부의 정치적 탈선은 1997년 대선 때 극에 달했다.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은 DJ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미림팀 조직과 대공 파트 핵심 요원을 동원해 북풍 공작을 직접 지휘했다.

국정원의 다른 한쪽에서는 1997년 대선을 맞아 또 다른 줄서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YS 정권 시절 호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안기부 대북전략국장을 지낸 후 대선 당시 차관급인 3특보를 맡고 있던 엄익준씨가 몰래 정보 보따리를 들고 김대중 후보 진영에 투신한 것이다. 엄익준 3특보는 권영해 안기부장이 주도하던 오익재 사건과 북풍 공작 등에 관한 정보를 정동영·천용택 의원 등 DJ 진영에 통째로 넘겼다. 엄씨뿐만 아니라 안기부 평직원이던 김모씨도 문건을 들고 몰래 DJ 후보 진영에 찾아간 사실이 들통나 파면당했다.
   
 
ⓒ연합뉴스
DJ 정권의 위기를 부른 진승현 게이트에 이어 불법 도청 혐의로 두 번 구속된 김은성 전 2차장(가운데).
 
 

DJ 정권의 천용택 원장 '국정원 개악'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해 정권 교체에 성공하자 동교동계에서는 엄씨와 김씨를 일등공신 취급했다. 그러나 정보기관 출신으로 ‘배신자를 중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앞세운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두 차례나 엄익준씨를 국정원에 중용하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동교동계에서는 이종찬 원장에게 김홍석씨의 복직도 권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엄씨는 끝내 이종찬 원장의 뒤를 이은 천용택 원장 시절에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으로 화려하게 승진한다. 김홍석씨 역시 이때 국정원 3급으로 승진 복귀했다. 국정원 직원은 YS 정권의 황창평씨에 이어 DJ정권 들어 엄익준씨와 김홍석씨가 대접받는 것을 보면서 ‘대선 시기에 정보 문건을 들고 후보에 줄을 잘 서면 저렇게 출세하는구나’ 하는 학습을 하게 된 셈이다.

공작 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DJ는 집권 후 정보기관을 환골탈태시킬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폐해를 답습하는 길을 택했다. 집권 초 안기부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고 공작 정치에 개입한 간부들을 대거 물갈이했다. 정보기관 출신 이종찬 원장을 기용해 ‘인적 청산’을 통한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단시일 내에 무리하게 인적 청산을 시도한 결과 무려 850여 명에 달하는 직원이 무더기 강제 해직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현철 사조직에 가담했다든지 정치 공작에 개입한 인물을 선별해 내보낸다던 당초 공언과 달리 영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부급에서 하위 직급에 이르기까지 유능한 직원들마저 대거 내쫓았다. 이들은 ‘국사모’(회장 송영인)와 ‘국강투’(회장 강신호)를 조직해 DJ 정권의 불법 강제해직의 부당성을 다투는 행정소송을 벌이는 등 두고두고 국정원 조직에 골칫거리가 된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 개혁이 개악으로 변한 때는 이종찬 원장에 이어 들어선 천용택 원장 때였다. 영남 출신 직원을 대거 내보낸 뒤 이종찬 원장은 그 빈자리를 고른 지역 안배로 채우는 정책을 폈다. 이 원장은 물론 초대 문희상 기조실장도 호남 출신이 아니어서 지연을 바탕으로 한 ‘끼리끼리’ 정서는 형성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호남 출신 국정원 일부 간부는 김홍일 의원 등 DJ 친인척 실세에 음양으로 줄을 대면서 이종찬 원장을 압박해 들어갔다. 동교동계와 국정원 내 일각에서는 이종찬 원장이 차기 대권욕 때문에 비호남 출신을 규합해 자기 세력으로 만들려 한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국 이 원장 축출에 성공한다. 뒤이은 천용택 원장은 호남 일색 인사를 강화했다. 이때부터 국장급 이상 간부 자리뿐만 아니라 직원 신규 채용에서도 호남 출신 채우기는 광범위하게 이뤄져 국정원 조직은 다시 한번 속으로 곪았다.

천 원장은 우선 대선 때 줄서기를 한 엄익준씨를 차장으로 발탁하고, YS 정권 때 오정소 대공정책실장의 심복 노릇을 하던 정성홍씨를 대공정책실 국내 정보수집 부서의 경제 2과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정보기관 사조직화의 주범들을 척결하겠다던 초기 개혁 명분이 일순 무너지는 인사였다.

정성홍 경제과장은 구명 과정에서 오정소 실장에게 보였던 탁월한 수완을 다시 한번 발휘했다. 정권 교체 당시 제주지부에 파견돼 있던 정씨는 당초 124명의 살생부 명단에 끼어 있었다. 이를 눈치챈 정씨는 마침 제주도를 방문한 김홍일 의원 쪽에 접근해 보름 동안 극진히 모시며 환심을 샀다. 이렇게 김홍일 의원을 뒷배경 삼아 강제 퇴직을 면한 정씨는 한동안 국정원 내에서도 한직으로 분류되는 정보관리국에 들어가 숨죽이며 지내다가 천용택 체제가 들어서자 실세로 부활했다.

   
 
ⓒ연합뉴스
정보기관의 불법 도청 내막을 잘 아는 정형근 의원(위)은 국정원 불법 도청 자료를 입수해 폭로했다.
 
 
과거 정보기관에 수없는 고초를 겪었던 DJ는 정보기관을 개혁하기는커녕 과거 정권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정권 몰락의 화를 자 초했다. 훗날 각종 게이트 사건으로 DJ 정권을 늪에 빠지게 만든 실마리를 제공한 정성홍 경제과장의 ‘활약’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국정원 내 동교동계 사조직의 핵심 간부인 엄익준 차장 밑에서 행동대장을 맡은 정 과장은 때마침 일기 시작한 코스닥 벤처 붐을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인척 했다. 이 기간 그는 DJ의 ‘숨겨둔 인척’을 특별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를 빌미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2000년 엄익준 차장이 암 투병으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김은성 차장 만들기에 나선 이도 정성홍 과장이었다. 결국 2001년 말 김은성 차장, 김형윤 경제단장, 정성홍 경제과장 등 동교동 실세의 국정원 내 사조직 노릇을 한 국내 파트 경제단 쪽에서 김형윤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 대형 권력형 비리가 줄줄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세 사람 모두 이때 구속됐다. DJ 정권에 극한 염증을 느낀 민심은 한나라당으로 이반해 이듬해 200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이회창 후보가 줄곧 정국을 장악했다. 뒷수습을 위해 신건 원장 체제가 들어섰지만 전남에서 전북으로 인사의 주도권만 바뀌었을 뿐 지역 편중 인사의 난맥상은 그대로 남았다.
   
 
ⓒ연합뉴스
정치권 줄대기의 원조는 1992년 13대 대선 당시 안기부 황창평 기획판단 국장(오른쪽)이었다. 황씨는 그 공로로 YS 정권에서 안기부 차장에 이어 보훈처 장관을 지냈다. 1997년 대선 때는 엄익준 3특보(왼쪽·사망)가 김대중 후보에게 몰래 줄댄 공로로 국정원 차장을 지냈다.
 
 

야당에 '도청 보고서' 통째로 전달

망가질 대로 망가진 국정원 안팎에서는 2002년 16대 대선이 다가오자 또다시 정치권 줄서기 행태가 고개를 들었다. 1997년 정권 교체 직후 DJ 정부가 인적 청산 대상으로 삼아 내보낸 850여 명의 영남 출신 가운데는 실무 능력을 인정받으며 잔뼈가 굵은 베테랑 요원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분함을 삭이지 못한 채 재직 중 취득한 정보 자료를 빼돌려 이를 무기로 무리한 구명운동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훗날 문제가 된 도청 전문가 공운영 미림팀장이 천용택 원장을 협박해 사업체 이권을 따낸 것도 그런 경우였다.

뿐만 아니라 현직 직원 중에서도 이회창 후보에게 줄선 국정원 직원이 적잖았다. 2001년부터 사실상 정국 주도권을 쥔 한나라당에는 국정원의 도청 보고서가 통째로 넘어왔다. 2002년 대선 직전 그 가운데 30여 쪽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지난 수십 년간 불법 관행이었던 국정원의 무차별 불법 도청 실상이 폭로됐다. 불법 도청 문제는 훗날 참여정부에서도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재점화해 2005년 끝내 DJ 정부 시절의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국정원 불법 도청이 정치 이슈로 급부상한 데는 김대중 대통령의 독특한 정보보고서 활용 스타일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림팀은 YS 시절 오정소 안기부 대공정책실장이 만들어 활용했다. 도청을 통해 여야 주요 정치인과 사회 각계 중요 인사의 동향은 물론 사생활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보고서였다. 그러나 YS는 안기부에서 올라오는 이런 상세 도청 보고서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안기부에 보고서 핵심만 간추려 올릴 것을 주문했고, 각계 중요 인사의 사생활과 관련해서는 ‘허리 아래 문제는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평소 토론과 장문의 글 읽기를 즐기는 DJ는 집권 후 올라오는 국정원 보고서에 대해 ‘읽을 게 없다, 자세히 써서 올리라’는 지시를 내리곤 했다. 국정원 도청 보고서에는 국가 정책 관련 사안보다는 주로 사회 각계 인사의 개인 신상과 사생활 등이 많이 담기게 되는데 국정원은 이런 생 보고서를 ‘조보’라고 부르며, 매일 아침 대통령에게 올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종찬 원장은 국가 통치자가 도청 생보고서를 접할 경우 ‘중독의 위험성’이 있다며 기피했다. 하지만 천용택 원장 들어서는 DJ의 입맛을 맞추는 쪽으로 변했다. 보고서 생산 관련 국정원 예산까지 늘려가며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상세한 ‘조보’ 생산을 독촉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무리한 불법 도청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 국정원 사실상 방치

1999년 하반기에 국회에서 발생한 이른바 ‘529호 사건’도 DJ의 그런 스타일이 빚은 부작용이었다. 국정원에서 국회 정보수집 연락관으로 파견한 안 모씨가 의원회관 529호를 안가로 삼아 도청 의혹을 살 만한 각종 서류를 쌓아두었다가 야당 의원들의 습격으로 탈취당해 정치 쟁점화한 사건이었다. 안씨는 사건 직후 사표를 내고 부산 지역의 한 대학교수로 내려가 있다가 참여정부 출범 초기 이종석 NSC 사무처장과 만나 현재까지 청와대에서 국장급으로 근무 중이다. 

   
 
ⓒ연합뉴스
김만복 국정원장(앞줄 오른쪽 세 번째)은 지난해 9월 ‘아프가니스탄 인질 석방 비밀 공작 성과’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비판받았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하자 DJ 정권에서 망가진 국정원 바로세우기가 정권 초기 중요 국정 과제로 떠올랐다. 선거운동 기간에 줄서기에 나선 일부 국정원 직원은 전세금까지 빼서 이회창 후보 당선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나중에 정권 교체에 실패하면서 재산을 날렸고, 노무현 정부 초기 비밀리에 조사를 받은 뒤 모두 지방으로 좌천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개혁 방향은 탈정치화·탈권력화를 내걸고 ‘정보기관 힘빼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취임 초 국정원 수뇌부에 재야 출신 고영구 원장과 서동만 기조실장을 기용한 노 대통령은 독대는 물론 보고서조차 직접 받지 않았다. 정보기관에 대한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한 노 대통령을 대신해 국정원 보고를 받는 곳은 국정상황실이었다. 집권 초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은 각 분야에 대한 국정원 보고서를 취합해 핵심을 간추린 뒤 노 대통령에게 올렸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칭찬을 받는 보고 내용은 ‘국정상황실 작품’으로 둔갑했고, 질책이 따르는 보고서는 ‘국정원 작품’이 돼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국정원은 노 대통령의 지나친 무관심과 국정상황실의 얄팍한 처신이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며 속앓이를 했다.

참여정부 초대 고영구 원장과 서동만 기조실장은 DJ 정권을 거치면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국정원 내 호남 비호남 갈등을 치유하는 것을 내부 개혁의 선결 과제로 삼았다. 조직 개편을 통해 호남(특히 전북) 출신 일색이던 1, 2급 부서장을 각 지역 출신으로 물갈이하고, 1974년 입사한 공채 10기 이상을 모두 부서장에서 보직 해임했다가 내보냈다. DJ 정권이 영남 인맥 청산을 개혁 과제로 잡았다면 노무현 정권은 ‘독재 권력 아래서 잔뼈가 굵은 중·노년층과 민주화 이후 입사한 신진 세력 간의 세대교체’를 개혁 목표로 삼은 셈이다.
   
 
ⓒ뉴시스
김만복 국정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 방침이 나온 뒤인 1월18일 대통령직 인수위 이경숙 위원장(왼쪽)이 진수희 정무분과 간사(오른쪽)로부터 보고받고 있다.
 
 
특히 유신시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상지대 교수에서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온 서동만 기조실장은 DJ 정권이 뿌린 국정원 내 호남 중심 기득권 세력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탕평 인사를 기치로 내걸었다. 1997년 정권 교체 과정에서 대량 해직된 영남 출신 퇴직자들의 원성을 달래는 조처를 하는가 하면 당시 불이익을 당해 한직을 맴돌던 하위직 영남 출신 직원들에 대해서도 능력에 따라 ‘탕평’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세대 교체와 지역 탕평을 통해 조직 혁신을 꾀하려 한 서 실장의 이런 조처는 보수적인 영남층은 물론 젊은 직원에게 합리적 인사 조처라고 크게 환영받은 반면 호남 출신 간부급 인사들에게는 항상 긴장을 심어주었다.

결국 이들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밀려 서동만 실장이 낙마하면서 후임 기조실장으로 김만복씨가 들어왔다. 김만복 실장은 고원장과 호흡을 맞춰 국민에게 신뢰받는 국정원으로 거듭나겠다며 과거사위원회를 꾸려 주요 7대 사건에 대한 조사작업을 벌였다. 그 와중에 20~30년 전 사건이 주가 된 안기부 과거사 청산 작업은 현재진행형으로 의심받던 불법 도감청 의혹 폭로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안팎으로부터 헛다리를 짚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DJ 정권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신건씨를 2005년 여름 구속해 사태를 수습했다.

고 원장 후임으로 들어선 2대 김승규 원장 체제에서는 또다시 호남과 부산 세력의 인사 대립이 고개를 들었다. 청와대 386의 국정원 견제에 쓴소리를 했던 김승규 원장 체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국정원을 철저히 방치한 노 대통령은 갈수록 심해지는 민심 이반에 대응해 2006년 11월 김승규 원장을 밀어내고 김만복 원장을 앉혔다.

김만복씨는 원장 기용 초기부터 안팎으로 자질 시비에 휘말렸다. 노 대통령이 김만복씨를 후임으로 내정하자마자 김승규 원장은 언론을 통해 ‘국정원을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청와대의 이호철 당시 국정상황실장, 국정원 이상업 2차장, 김만복 1차장으로 이어지는 부산 라인과 김 원장의 호남파가 국정원 내에서 심각하게 대립하던 뒤끝이었다.

서동만 전 기조실장도 공개적으로 ‘김만복 국정원은 정치화될 수밖에 없다’라며 강도 높게 문제를 제기했다. 과거 전력(김만복원장은 유신시대 서울대 학원사찰 담당)과 주요 지휘 계통 부서장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김씨를 원장으로 앉히면 노무현 정부의 개혁 성향에도 부적할 뿐 아니라 내부 조직 기강과 영도 서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안팎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만복 체제를 밀어붙였다. 여기에는 ‘정권 말에 믿을 곳은 동향밖에 없다’는 노 대통령 부산파 측근의 세몰이가 크게 작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만복 원장은 1년여의 재임 기간 중 각종 돌출행동으로 구설에 올랐다. 지난해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인질 석방 과정에서 자신의 공적을 널리 알리는 통에 세계 만방에 비밀 정보공작을 스스로 드러내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였다는 비난을 자초했다. 또 고향인 부산 기장군 주민을 단체로 국정원에 견학시키고, 각종 지역 행사에 명함을 들이밀어 현직 국정원장이 총선 출마 행보를 벌인다는 자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일각에서는 대선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였다는 비판도 나왔다.

2007년 대선에선 정치권 줄서기 줄어

2007년 대선 기간에 국정원 현직 직원의 정치권 줄서기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시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선을 전후해 김만복 원장은 국정원에 ‘부패척결 TF팀’을 운용했는데 일부 요원이 이명박 후보 친인척에 대한 뒷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인 사실이 드러나 이 후보로부터 ‘집권하면 반드시 손볼 정치 공작’이라는 반발을 샀다.

한나라당 경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6월에는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현직 국정원 서기관 박 아무개씨의 보고서 유출 사건이 일어났다. 박 서기관은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과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박근혜 후보가 1970년대 말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최태민 목사와 여러 가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 담긴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를 언론에 흘렸다.

박근혜 후보는 이에 격하게 반발하며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을 제기하고 김만복 원장을 항의 방문했다. 당시 김 원장은 ‘자체 조사 결과 그런 문서도 없고 유출된 적도 없다’라고 답변했지만 박 후보가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자 국정원은 다시 자체 감찰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직원 박씨 집과 승용차에서 수십 건의 국정원 문서를 압수했고, 이 보고서를 이용해 정치권 인사를 접촉한 혐의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김 원장은 지난 연말 문서 유출에 가담한 직원 박씨를 파면 조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보기관 수장이 스스로 방북 대화록 문서를 언론에 유출해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

김 원장이 벌인 ‘이상한’ 퍼레이드는 대선 전날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이명박 후보가 당선하자 지난 1월12일 ‘방북 대화록’을 언론에 흘린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참여정부 국정원도 ‘함량 미달’임이 드러나 새 정부의 개혁 및 재편 수술대에 오르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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