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에는 철칙이 하나 있다. 두세 명의 작당으로 가능한 음모는 실현 가능성이 제법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수십 명이 가담해야 하는 음모론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국가기구는 물론 야당과 학계와 언론까지 가담해야 성립하는 초대형 음모론은, 이미 과대망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모론은 대체로 “두세 명 만으로도 실현 가능하다”라는 주장으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반박이 힘든 반론이 들어오면, 음모의 규모를 확장한다. “그들도 음모 가담자다”라고 재반론한다. 이 과정이 거듭될수록 음모론이 지목하는 가담자는 늘어나고 신뢰도는 떨어진다. 대선 이후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불붙은 개표 부정 음모론은 정확히 이런 궤적을 따랐다.

대선 직후에는 선거 결과를 못 믿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으나 산발적이었고 근거도 취약했다. 결정적 변곡점은 12월25일이었다. 아이디 ‘그루터기추억’은 다음 아고라에 “대선 개표 그래프가 정확히 로지스틱곡선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토록 매끈한 곡선이 나올 수 없다. 인위적인 결과물이다”라는 주장을 올린다. SNS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울대 장덕진 교수(사회학)는 “이 로지스틱함수 가설이 부정선거 여론에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여론 결집이 일어났다. 일단 시동이 걸린 다음에는, 우호적인 증거를 선택적으로 수집해 나갔다”라고 분석했다.

로지스틱함수 가설이 강력했던 이유는, 개표 부정 음모론을 ‘소수의 가담’만으로 설명하는 논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가설은 간단히 말해 “실제 개표 결과와 관계없이, 집계 프로그램에 접근이 가능한 한두 명이 선관위가 발표하는 개표 결과를 인공적 함수에 따라 조작했다”라는 암묵적 주장을 깔고 있다.

문제가 있었다. 민주당은 전국 252개 개표소에 참관인 1776명을 파견했다. 선관위의 개표 현황과 별개로 민주당도 현장 개표 결과를 실시간으로 본다. 만약 선관위 집계 결과를 조작했다면, 민주당 개표 참관인의 눈에 띄지 않을 방법이 없다. 개표소 252곳 중 그런 보고가 올라온 곳은 전혀 없다. 극소수 가담자가 선관위 집계 결과만 조작했다는 음모론이 무력해졌다. 또한 학계에서도 로지스틱곡선이 실제 개표 상황에서도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 “매끈한 곡선으로 보이는 게 당연” ).

음모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계 이전에 개표소의 개표부터 조작됐다는 주장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그렇게 됐다. 전자개표기 부정 의혹, 개표소의 표섞임 의혹 등이 등장했다. 여기서부터는 10년 전 보수 진영의 주장과 판박이다(20~22쪽 기사 참조 : 개표 부정 논란의 끝 10년 전을 보라 ).

이 버전의 문제는 ‘음모 가담자’가 순식간에 너무 많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먼저 선관위 전체가 가담자가 된다. 많은 음모론이 청와대·정부·정당 등을 마치 한 몸처럼 취급하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까놓고 말해 선관위에도 ‘여당 사람’ ‘야당 사람’이 다 있다. 선관위 전체가 동원될 음모가 있었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오류 입증돼도 신념 더 강해져

더 큰 모순도 있다. 민주당은 252개 개표소에서 조직적인 개표 부정 사례를 접수한 것이 없다. 시장바닥같이 완전히 공개된 개표 현장에서 수백만 표를 바꿔치기하며 참관인 1776명의 눈을 모두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음모론은 필연적으로 민주당을 음모 가담자로 집어넣는다. SNS에서는 민주당이 개표 부정 음모론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두고 “그들도 기득권이기 때문에 친노의 대선 승리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규모 부정이 있었다면,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던 대선 당일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말이 되지 않는다. 출구조사는 투표장 밖에서 따로 조사한 결과이므로, 개표 결과가 조작되었다고 해도 출구조사는 정확한 표심(음모론의 전제를 따르면, 문재인 후보 승리)을 반영해야 한다.

그래서 출구조사 조작설도 등장했다. ‘음모 가담자’는 또다시 늘어났다. 이번에는 조사기관과 방송 3사다. SBS 개표방송을 진행한 김성준 앵커는 트위터에서 “출구조사와 개표방송 조작을 양심선언하라”는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음모론 진영은 ‘명백한 개표 부정’을 보도하지 않는 진보 성향 언론들 역시 권력에 굴복한 ‘음모 가담자’로 간주했다. 논란이 그치지 않자 〈한겨레〉 온라인판은 개표 부정 의혹을 정리하는 기사를 1월3일 내보냈다. 기사는 음모론의 핵심인 로지스틱함수 의혹에 대한 학계의 회의적인 반응을 소개했다. 어용학자라는 비난이 즉각 등장했다. 학계도 ‘음모 가담자’가 되었다. 사실상 온 세상이 음모 가담자라는 초대형 음모론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반론과 재반론을 거치며 지나치게 몸집을 불린 음모론은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가장 곤혹스러운 곳은 민주당이다. 재검표를 주장할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음모론의 성화가 하도 거세어 답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민주당은 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 소속 의원들이 이 문제를 검토 중이라지만, 실제로는 맡겠다고 나서는 의원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표 부정이 없다고 하면 지지자에 죽고, 있다고 하면 입증을 못해 죽는 자리”(행안위 관계자)를 맡을 의원이 없는 것이다.

개표 부정 음모론은 왜 사그라지지 않을까. 학자들은 ‘집단 극단화’ 현상에 주목한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다보면 집단 전체가 더 극단적이고 모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개표 부정 음모론은 수작업 재개표를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문재인 전 후보와 민주당에 대단한 정치적 부담(‘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세력’)을 지운다. 하지만 음모론 진영은 이 부담을 과소평가하는 전형적인 모험주의를 보여준다.

법학자이자 인간행동 연구자인 캐스 선스타인 교수(〈넛지〉 공저자)는 최근작 〈루머〉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부시 정부의 주장(사실은 없었다)을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보여줬더니, 이들은 신념을 바로잡기는커녕 더욱 강화했다. 이들은 반대 의견을 일종의 ‘공격’으로 간주했고, 확신을 강화해 ‘방어’했다. 또 선스타인 교수는, 보수주의자는 보수 매체(폭스 뉴스), 진보주의자는 진보 매체(〈뉴욕 타임스〉)가 자신의 신념이 틀렸다고 지적해야 그나마 수용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음모론 진영에서만 원인을 찾을 일도 아니다. 음모론은 국가기관을 불신할 때 가장 왕성하게 성장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선관위는 선거 관리와 선거법 적용의 형평성을 둘러싸고 수도 없는 논란에 휩싸였다(〈시사IN〉 제239호 커버스토리 참조 ). 음모론이 유행할 토양을 깔아준 셈이다.

새누리당 심재철 최고위원은 1월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허위사실 유포자는 선관위가 형사 고발하라” 하고 주문했다. 이런 태도 역시 국가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주기적으로 음모론이 발호할 토양을 만든다. 서울대 장덕진 교수는 “SNS에서는 음모론이 점화됨과 거의 동시에 ‘자정작용’도 강하게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음모론은 자유로운 의견 교환 과정에서 정리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지적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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