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5월11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뒤 한 달이 지나도록 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시사IN〉은 6월 초,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경제학자로서 한국의 재벌 기업 지배구조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나 삼성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장 교수는 국민경제를 위한 관점에서 삼성 문제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경영자로서의 이건희 회장(이하 직위 생략)을 어떻게 평가하나? 대단한 일을 해냈다. 물론 세습받아 조금 더 키운 것 아니냐고 폄하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이건희가 상속받았을 때 삼성은 해외 거대 기업들로부터 하청받은 물품을 만드는, OEM 업체에 불과했다. 그랬던 삼성전자가 지금은 휴대전화·반도체·텔레비전 등 세계 전자산업의 여러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세계시장에서 첨단 제품들의 필수 부품을 독자 생산할 수 있는 업체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애플이 아이폰 한 대 생산할 때 (그 부품 생산과 조립을 대부분 다른 나라에 위탁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나라가 한국이다. 삼성이 애플에 파는 부품 덕분이다.
ⓒ시사IN 자료
삼성은 ‘악덕 기업’이라 욕을 먹기도 한다.
잘못한 일이 많다. 삼성은 대다수 국민의 희생으로 성장했다(편집자 주:시민들이 싼 임금으로 일해주고, 형편없는 제품도 구입해줬다. 삼성이 받은 정책금융도 따지고 보면 세금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삼성은 오히려 시민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경제 정책을 만드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관계·학계 등에 삼성 장학생을 심고 악착같이 무노조를 고수했으며, 산업재해에 대해서도 계속 발뺌하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1990년대 이후엔 ‘노동의 외주화’(삼성전자서비스처럼 삼성 본사에 필요한 업무지만 법률적으로는 무관한 회사를 만들어 불안정 저임금 노동자를 양산)를 확대했다. 그런 사회적 폐해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첨단산업에서는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안목 아래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다. 삼성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들에 과감히 투자해왔다.

해외의 다른 돈 많은 경쟁 업체들은 투자하지 않아서 결국 삼성전자에 패배한 것인가. 이들 역시 어떤 산업이 유망한지는 알고 있었을 텐데 투자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구조적 문제가 있다. 상당수의 세계적 기업들에서는 주주가 경영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른바 ‘주주가치 경영’ 혹은 ‘주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주주들은 투자한 뒤 가급적 짧은 시간 내에 큰 수익을 돌려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주주가치 경영’을 하는 기업들은 6개월~1년(삼성처럼 십수 년 혹은 수십 년이 아니라) 보고 경영을 하게 된다. 돈이 좀 쌓이면 주주들이 돈을 내놓으라고 해서 투자에 차질을 겪는다. 애플이 좋은 사례다.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을 때는 대부분의 이윤을 기업 내부에 쌓아놓고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그러나 잡스 사후엔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숨죽이고 있던) 주주들이 애플에 배당률을 높이고 자사주를 매입하라며 덤벼들고 있다(기업이 쌓아둔 돈으로 자사의 주식을 사들이면 전체 주식 수가 줄어서 주가가 상승한다). 애플은 단기 수익을 바라는 주주들에게 돈을 나눠주게 되면서 비슷한 규모의 다른 기업들에 비해 연구개발 투자를 덜하게 되었다. 구글의 경우, 매출액 대비 10%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그러나 애플은 2% 정도다. 삼성은 이런 단기 주주들의 압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자금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도 주식회사다. 그런데도 장기 투자가 가능했던 이유는? 삼성 특유의 지배구조 때문이다. 이건희 가문이 삼성그룹 전체에 대해 가진 지분은 5~6%에 불과하다. 겨우 이 정도의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상당수 주주들이 원해도 경영자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특유한 구조가 삼성그룹에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순환출자다. 이건희가 단지 ‘지분 5%’의 전문경영인에 불과했다면, 이익이 날지 안 날지도 불투명하고 이익이 난다 해도 10~15년 후에나 발생하는 대규모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주주들로부터 쫓겨난다.

ⓒ삼성그룹 제공2010년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에 가족과 함께 참석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운데).
‘경제 민주화’에 역행하는 말씀 같다. 지난 대선 당시 여야가 공통적으로 제기한 경제 민주화 의제 중 하나가 바로 순환출자 금지다.
그 ‘민주화’가 누구를 위한 민주화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순환출자 금지가 경제 민주화라는 주장에는 다음 같은 논리가 깔려 있다. “모든 주주는 자신이 가진 지분만큼만 기업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1주1표 원칙). 그런데 이건희 일가는 겨우 5% 지분으로 마치 과반수 주주처럼 계열사들을 지배한다. 이건희 일가 역시 5% 지분만큼만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해서 다른 주주들과 균등한 지위를 갖게 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경제 민주화는 ‘주주들 간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주주뿐 아니라 모든 국민의 ‘경제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삼성 문제를 봐야 한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성장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진 빚, 한국 경제의 미래에서 삼성의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만약 삼성이 앞으로도 대규모 장기 투자를 계속하는 것이 국민경제에 필요하다면, 그 구조를 보장해주는 것이 더 민주적일 수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다. 경영자의 잘못된 의사결정이나 외부 충격으로 삼성전자가 잘못되면 국민경제 전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필요한 경우엔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 같은 ‘가족 기업’이나 순환출자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거 아닌가? 우리가 영국·미국의 기업제도만 ‘정답’으로 여기기 때문에 순환출자 등을 ‘반칙’으로 여기는 것이다. 유럽 선진국이나 아시아 부국들의 경우, 가족 기업이 장기 대규모 투자를 훨씬 잘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국가인 스웨덴만 해도 발렌베리 같은 ‘가족 그룹’이 있는데 삼성보다 규모가 더 크다. 발렌베리의 경우, 이 가문의 재단이 인베스토르라는 지주회사를 보유하고, 인베스토르는 다시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등 세계적 기업들을 지배한다. 또한 주식의 차등의결권 때문에 인베스토르는 주식 보유액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식 수는 10%에 불과하더라도 30%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발렌베리 계열의 기업들이 주주에게 흔들리지 않고 장기 대규모 투자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경영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다. 시장주의로 불리는 싱가포르만 해도, 전체 GDP에서 공기업 비중이 22%나 된다. 미국은 1%다. 그렇다고 싱가포르에 ‘국가가 기업을 지배하는 잘못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나? 싱가포르가 사회주의 국가인가? 영국과 미국의 관점만 옳다고 생각하니까 발렌베리나 싱가포르가 이상해 보이는 거다.

ⓒ시사IN 자료2007년 11월5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위)으로 삼성 비자금과 검찰 커넥션 등이 드러났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외국인 주주들 사이에서 ‘삼성전자가 쌓아둔 현금을 토해내게 만들자’는 이야기가 떠도는 모양이다. 삼성을 현금 자동인출기로 만들자는 거다. 이건희 회장이 입원한 뒤 삼성전자 주가가 오히려 올라가지 않았나? 얼핏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입원하면 주가가 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요즘 주주들은 순진하지 않다. 오히려 ‘저 사람 사라지면, 삼성전자에 압력을 행사해서 배당률을 높이고 자사주를 매입하게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삼성전자 주식을 매집하면서 주가를 올렸다.

삼성그룹 지배구조가 취약하다. 현재 이건희 가문이 에버랜드를,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빈자리가 생길 경우,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 처지에서는 일종의 ‘통치권 공백’이 발생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단기 주주들은 자기 구미에 맞는 CEO를 영입하려 할 것이다. 장기적 위험 투자 보다는 주주들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사람으로 말이다. CEO는 주주들 말을 잘 듣는 대가로 엄청난 보수를 받을 수 있다. 미국 기업들이 그렇다. 주주들은 단기에 큰 수익을 올리면 되니까, 기업을 망칠 정도로 무리하게 배당하는 CEO라도 좋아한다. 지금 애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삼성을 덮칠 수 있다. 애플의 아이폰5는 시장에서 그리 호평받지 못했다. 이후에도 괜찮은 신제품이 없다. 물론 애플이 그동안 쌓아둔 명성과 기술력 등을 감안하면 갑자기 붕괴하진 않을 거다. 그러나 애플의 전망을 밝게 보기는 힘들다.

이건희 회장은 입원하기 전, 여러 첨단 신산업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밝힌 바 있다. 하나같이 대규모 장기 투자가 필요한 산업들이었다. 삼성의 지배구조가 흔들리면 그런 일이 불가능해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아직 한국은 새로운 첨단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나라다. 지금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의 국민소득이 일인당 4만~5만 달러다. 한국은 2만 달러 정도니 아직 멀었다. 한 단계 더 치고 올라가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새로운 첨단산업들에 진출할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 제공6월12일 열린 ‘삼성 갤럭시 프리미어 2014’. 20여 년 전 삼성은 OEM 업체에 불과했다.
금융·산업 분리 문제도 있다. 삼성그룹엔 삼성전자 같은 일반 회사와 더불어 삼성생명 등 금융회사도 있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삼성카드가 에버랜드 주식을 가지는 등 일반 기업과 금융기업이 상대방의 주식을 어지럽게 보유한 가운데 이건희 가문의 삼성그룹 지배권이 보장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금산분리(금융기업과 일반 기업을 분리)’가 추진되고 있는데, 이후 삼성그룹은 일반 기업이나 금융기업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금산분리에도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금산분리라는 사고방식 역시 20세기 초 미국의 상황(제이피모건, 밴더빌트 등 금융·산업 복합기업들이 독점력으로 나라 경제를 전횡하던)에서 나온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금산분리 역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절대적으로 옳은 원칙일 수는 없다는 거다. 독일·일본 같은 나라들은 오히려 금산분리가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많다. 이 나라들에서는 은행이 기업 주식을 다수 보유하면서 대주주로 경영에 개입하고 필요할 때는 대규모 대출도 시행했다. 기업 처지에서는 장기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금산분리 때문에 삼성그룹이 해체되어야 한다면 그 원칙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를 넘어, 그 결과가 한국 경제에 ‘좋으냐, 나쁘냐’를 따져봐야 한다. ‘나쁘다’면 ‘삼성법’ 같은 것을 따로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삼성법이라니? 국민경제 차원에서 중요한 기업이라면, 해당 기업이 계속 장기적 투자로 국민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법률적 틀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독일엔 ‘폭스바겐법’이라는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폭스바겐 주식을 대량 거래하는 경우 규제를 받는다. 특히 폭스바겐을 다른 회사에 팔거나 아예 문을 닫는 등 아주 중요한 의사결정에는 니더작센 주정부(폭스바겐의 본사가 있는 지역)가 개입할 수 있다. 니더작센 주정부는 폭스바겐의 지분 중 19%를 가지고 있는데, 주요한 의사결정 시에는 보유 지분보다 훨씬 큰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삼성의 경우에도, 만약 금산분리 원칙의 적용으로 그룹 자체가 해체되어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새로운 법률로라도 불행한 사태를 차단해야 한다.

삼성그룹이 붕괴되더라도 다른 주체가 삼성전자를 인수해 더 잘 경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어떤 기업도 어떤 나라도 절대 안전하지 않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1955년 한 해 동안 차를 350만 대 생산했다. 당시 일본에는 자동차 기업이 11~12개 있었는데 모두 합쳐서 한 해에 7만 대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도요타가 제일 컸는데 3만5000대 생산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나? 불과 십수 년 만에 GM은 기울고 일본 도요타가 세계적 기업으로 부상한다. 활력 있는 기업은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확장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기업을 단기적 주주 경영에 맡겨버리면 망하는 건 순식간이다. 한국의 경제 활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지 않나?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엔 연평균 6% 이상이었던 1인당 GDP 성장률이 주주자본주의에 노출되면서 4%로 갔다가 요즘엔 2~3%대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까지 애플처럼 슬슬 기울게 될까 봐 두렵다.

지금 굉장히 무서운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웃음) 자칫 이건희 가문에 특혜를 주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특혜일까? 지금 삼성전자의 경우, 국민연금공단이 7~8%의 지분을 갖고 있다. 회장 유고가 발생하는 경우, 국세청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3세들로부터 상속세를 삼성전자 주식으로 받아(주식 가격을 더 높게 쳐줄 수도 있다) 국민연금공단에 인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공단이 삼성전자의 확고한 최대 주주가 되고 삼성 가문의 지분은 크게 줄어든다. 삼성전자에 대한 국민들의 발언권이 크게 강해지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경영하도록 압력도 행사할 수 있다. 이건희의 후계자가 엉뚱한 경영을 일삼는다면 일정한 기간 뒤에 CEO 자리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

어떤 분들은 “국유화 아니냐”라며 당신을 ‘좌빨(좌익 빨갱이)’로 부를 수도 있다(웃음). 아니다. 내 이야기가 실현되어 정부(국민연금공단)의 삼성전자 지분이 12~13%에 이른다 해도 국유화라고 할 수 없다. 주정부 지분이 19%인 폭스바겐의 경우에도 국유기업으로 불리지 않는다. 프랑스의 유명한 자동차 회사인 르노의 경우, 의결권의 30%를 정부가 갖고 있다. 독일 정부는 코메르츠 은행의 지분 중 25%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도 국유기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는 되는데, 우리나라만 안 된단 말인가. 이건희 가문의 영속적 지배를 보장해주자는 것이 아니라 장기 투자가 가능한 삼성그룹의 현재 구조를 유지하자는 거다. 국민경제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말이다. 이를 위한 법률을 제정할 수도 있고…. 법과 질서는 결국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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