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당시 이명박 정부가 대기업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춘 명분은 경기 활성화였다. 감세에 고무된 대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면, 이로 인해 축적된 부(富)가 일반 가계에 임금 인상, 배당금, 추가 고용 등 다양한 형태로 흘러넘칠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임금은 생산성 상승폭만큼 올라가지 않았으며, 고용환경은 더욱 팍팍해졌다. 이 덕분에 대기업들은 더 많이 벌고 더 적은 세금을 내게 되었지만 결코 더 쓰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대기업들이 저축한 자금(기업저축=사내유보금) 규모는 매년 최고 수준을 경신해 지난 1분기에는 무려 710조원(30대 그룹)을 기록하게 되었다. 지난해 한국 GDP(1500조원)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가계는 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줄어드는 바람에 저축은커녕 빚만 늘려가고 있다. 가계부채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다.

이처럼 기업에서 가계로 이어지는 자금(임금·이자·배당금)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지난 몇 년 동안 2~3%대에 머무르면서 장기침체의 가능성마저 나타나고 있다. 결국 천문학적 자금을 저축한 대기업들에게 좀 더 적극적인 투자를 촉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4월9일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가 경총 앞에서 사내유보금과 일자리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정책화된 첫 사례가 지난해 8월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기업소득환류세제’다. 기업이 벌어들인 순이익 가운데 가계소득으로 흘러가는 투자, 임금 인상, 배당금 등에 지출하지 않은 자금에 추가로 세금을 물리는 제도다. 이런 자금이 쌓인 것이 바로 사내유보금이다. 순이익 1000억원인 기업이 투자, 임금 인상, 배당금 등에 200억원만 지출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순이익의 80%(800억원)에서 200억원(투자, 임금 인상, 배당금)을 뺀 600억원에 10%의 세율을 적용해서 60억원을 징수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지출을 많이 할수록 세금이 줄어든다. 800억원을 지출했다면 한 푼도 세금으로 낼 필요가 없다. 기업환류세제의 목적은 징세가 아니라 기업들의 더 많은 지출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환류소득세의 대상은, 대기업들이 3년(2015~2017) 동안 벌어들이는 순이익일 뿐이다. 기업들이 이미 쌓아놓은 거대 규모의 사내유보금은 건드리지 못한다. 더욱이 기업 처지에서는 적게 지출해도 이로 인해 내야 하는 기업소득환류세가 크지 않아 압박 수단으로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기업들이 이미 쌓아놓은 사내유보금까지 과세 대상으로 삼고 압박 수단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사내유보금 중 투자, 임금 인상, 추가 고용, 배당금 등으로 지출할 수 있는 자금은 얼마나 될까? 일부 정치인들은 ‘사내유보금 710조원 중 10%(71조)만 동원해도 엄청난 재정투입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사내유보금 전체를 현금화해서 지출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의견이다. 이에 대해 대기업과 이들을 대변하는 이익단체, 연구기관 등은 사내유보금 중 대부분이 이미 기계설비·공장·토지 등 실물자산에 투자되어 있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자금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전경련 측에서는 그 비중이 80% 이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렇다고 남은 20%를 지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 처지에서는 미래의 예상치 못한 리스크에 대응할 수 있는 유동성을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 말이 옳을까?

이를 판단하려면 먼저 사내유보금의 개념부터 확실히 잡을 필요가 있다. 사내유보금이라는 용어는 마치 특정 기업이 사내의 금고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들리지만 이는 오해다.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거둔 순이익 중 세금과 배당금을 내고 남은 부분이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자금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기업의 창고에 현금으로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설비나 공장 등 실물자산은 물론 각종 금융상품의 형태로도 잠겨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전경련의 주장(‘사내유보금의 대부분이 이미 활용되고 있다’)은 옳은 부분도 있고 그른 부분도 있다.

삼성전자의 사내유보금 살펴봤더니…

삼성전자의 지난 1분기(2015년 1~3월) 연결재무제표(삼성전자와 그 종속회사들의 재무 정보를 통합해 표현)를 통해 사내유보금 중 어느 정도가 활용 가능할지 가늠해보자(아래 표 참조).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그 종속회사들이 운용 중인 자금은 모두 227조원 정도다. 삼성전자 등은 당초 밑천인 자본금 7조원(삼성전자 단독으로는 8975억원. 나머지는 종속회사 자본금)에 그동안의 순수익 중 지출하지 않고 축적한 돈(사내유보금 혹은 잉여금) 160조원, 그리고 추가로 빌린 부채 60조원 등 227조원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이 227조원 중 삼성전자의 사업 행위에 필요불가결한 부분을 제외하면 활용 가능한 몫이 나올 것이다.

우선, 삼성전자 등이 실물자산(기계·토지·공장 등 유형자산), 그리고 연구개발·특허 등과 관련되는 무형자산에 투자한 돈은 모두 88조8000억원으로 평가된다. 매출채권(외상금, 25조원), 미수금(2조5000억원), 재고자산(보유 중인 중간재와 완성재, 19조원) 등 ‘현금 형태가 아닌 자산’이 46조5000억원 정도다. 각종 선급비용(원자재나 상품 구입을 위해 미리 지급하거나 지급할 돈)도 10조원가량이다. 기본적 사업 행위에 145조3000억원 정도가 잠겨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 등이 현금으로 보유하거나 증권으로 갖고 있는 자금은 73조5000억원 정도다. 이 중 삼성전자가 종속기업을 지배할 목적으로 보유한 증권의 가치가 17조5000억원이다. 이런 증권들은 삼성전자 고유의 사업 전략과 관련되므로 매각해서 현금화하기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은 56조원 정도다. 이 56조원은 ‘현금 및 현금성 자산(현금과 예금, 18조4000억원)’ 및 단기 금융상품(자산가치 보전 및 증식을 위해 보유한 증권, 37조6000억원)으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봤듯이 삼성전자의 사내유보금 160조원 전체가 지출 가능한 돈은 아니다. 그러나 ‘사내유보금의 대부분이 이미 사용되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투자는 불가능하다’는 전경련의 논리도 사실과 다르다. 삼성전자는 ‘미래 리스크를 대비해 보유해야 하는’ 현금은 물론 ‘짧은 시간 내에 돈으로 바꿀 수 있는’ 37조6000억원 규모의 단기 금융상품을 추가로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자금운용의 재원 중에 부채 60조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안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 기사의 사례인 삼성전자는 세계적으로 투자 성향이 높은 기업이다. 다른 한국 기업들은 삼성전자에 비해 투자나 임금 인상 등에 활용 가능한 돈이 상대적으로 더 많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삼성전자의 경우에도, 실물투자로 분류한 토지 매입 등이 핵심적 경영행위에 필요한 재원이 아니라 ‘돈놀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재무제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 등은 사내유보금 중 사업이 아니라 자산(증권·부동산 등)에 투자된 부분에 대해 법인세율을 현행 22%에서 38%로 대폭 올리는 법인세법 개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기업들이 자사의 저축(사내유보금)으로 사업(투자·혁신)이 아니라 금융수익이나 내려고 하는 행태를 고율 과세로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기본적 발상은 박근혜 정부의 기업소득환류세제와 같지만 3년 동안의 순이익뿐 아니라 이미 쌓인 사내유보금까지 겨냥하는 데다 세율도 높기 때문에 실질적인 압박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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