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해룡(사진가)
후쿠오카현 지쿠호는 일본 최대 탄광지역이다. 1928년 한 탄광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후쿠오카현 내에서 조선인을 고용하고 있는 광산은 31개소, 조선인 노동자는 6511명. 이 가운데 미쓰비시계 탄광이 5202명으로 약 80%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10년 뒤인 1938년 조선인 노동자는 6만105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1995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규슈 지쿠호(筑豊) 지역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취재하고 있었다. 프리랜서 사진가로 처음 취재한 현장이었다. 글자로만 알았던 강제동원 현장을 눈으로 보고, 강제노동 피해자를 직접 만났다. 묘지, 위령탑, 납골당 그리고 이름도 묘비도 없는 무덤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순직비 또는 위령비 속에서 조선인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당시 기사는 한 월간지에 사진과 함께 발표됐다.

아들의 첫 기사를 한동안 들여다보던 아버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어렵게 꺼낸 첫마디는 마치 넋두리 같았다. “그때는 그랬어. 나도 홋카이도에 끌려갔었거든. 어쩔 수가 없었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제동원의 역사는 교과서나 책이 아닌 나의 가족사였다.

ⓒ안해룡(사진가)도카이도 본선(東海道本線)의 아타미 역과 간나미 역을 연결하는 단나 터널은 총연장 7804m에 달한다. 철도용 복선 터널로 일본에서 가장 길다. 낙반·출수·감전 등 각종 사고로 난항을 거듭하며 공사가 지연되어 착공 16년 만인 1934년 개통됐다. 단나 터널 공사로 노동자 67명이 숨졌다. 철도성은 아타미 역 방면 터널 입구 위에 단나 터널 공사 ‘순직비’를 세웠다.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도 7명 포함되어 있다.
ⓒ안해룡(사진가)
1995년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아마기 공원 언덕에 세워진 ‘징용 희생자 위령비’

 

ⓒ안해룡(사진가)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의 오코바 역 부근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 노동자는 500여 명이었다. 건설회사 하자마구미가 1908년 10월에 세운 ‘철도공사 중 순난병몰자 추도기념비’에는 조선인 노동자 이름이 처음 나온다.
ⓒ안해룡(사진가)‘철도공사 중 순난병몰자 추도기념비’ 뒷면에 적힌 사망자 명단 13명 중 한 명이 조선인 최길남씨다. 최씨는 1908년 3월16일 오코바 역 주변 공사 현장 사고로 사망했다.


실마리는 지난해 4월 찾아왔다.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 기간에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조사하는 일본의 시민단체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편집한 자료집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출판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 전역에 있는 위령비 중 확인된 160여 곳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적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자료집을 기초로 내가 방문한 지역을 확인하고, 가지 못한 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추도비에 새겨진 조선인의 이름은 우리가 기억 저편에 두고 잊어버렸던 시간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저 모두 ‘점’으로만 남아 있다. 점으로만 남은 현장을 ‘선’으로 이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손에 자료집을 들고 순직비와 추모비와 위령비를 찾아다녔다. 다시 오키나와로, 규슈로 향했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구마모토, 가고시마, 미야자키, 야마구치, 히로시마, 효고, 오사카, 교토, 아이치, 시즈오카, 지바, 사이타마, 군마, 나가도, 니가타, 아키타까지. 현장만큼이나 문서 자료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추론하는 것도 중요했다. 가능하면 1910~1920년 노동 현장이 어떤 곳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을 찾고 싶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오지에서, 어떤 도구로,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된 자료는 물론,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과거 논문과 기사를 찾아 복사했다. 취재 지역의 도서관이나 자료실에도 소중한 자료가 많았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꼼꼼한 지역조사 자료와 헌신적인 안내 역시 큰 힘이 됐다.

구마가와 계곡 절경을 가르며 달리는 두 량짜리 관광열차 ‘이사부사호(號)’는 하루 네 번 오코바 역에 관광객을 풀어놓는다. 오코바 역은 구마모토현 히토요시 역에서 가고시마현 요시마쓰 역까지 이어지는 히사쓰 선의 대표 명소다. 낡은 목조건물이 매력적인 무인역이다. 열차 방향을 돌리기 위한 루프선(loop track)이 있고, 급경사에서 높이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그재그 모양으로 선로를 놓은 스위치백(switch-back)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열차 관광의 재미를 더한다. 오코바 역사 안에는 한국어로 된 관광객 메모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아름다운 오코바 역 인근 낡은 추모비

하지만 오코바 역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언덕의 선로 오른쪽 한구석에 낡은 비가 하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철도공사 중 순난병몰자(殉難病没者) 추도기념비’다. 이 구간 공사를 담당했던 건설회사 하자마구미(間組)가 철도 부설 공사 중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1908년 10월 세운 추도비다. 사망 일자, 출신지, 이름, 연령순으로 새겨놓은 명단 13명 가운데 낯익은 모양의 이름이 보였다.

 

ⓒ안해룡(사진가)이야마 선(飯山線)은 나가노현 나가노시의 도요노 역에서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 있는 에치고카와구치 역까지 이어진다. 1927년 7월31일 낙반 사고로 사망한 18명 중 5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다자와 터널 순난자 추모비’가 다자와 역 구내에 세워졌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추모비의 소재는 불분명했다.
ⓒ안해룡(사진가)지쿠호 탄광지역의 절이나 납골당에는 탄광 사고로 죽은 조선인 유골이 아직도 산재해 있다. 왼쪽 사진은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미다테 묘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인 유골이다.


최길남. 한국 경기도 남양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서른셋의 노동자로 1908년 3월16일 오코바 역 주변 공사 현장 사고로 사망했다. 시기를 보면 한일병합이 이뤄지기 2년 전이다.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추도비다. 이 추도비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주 시점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이미 조선 출신 노동자가 일본 철도 부설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구마모토현 히토요시 역에서 가고시마현 요시마쓰 역까지 이어지는 히사쓰 선은 군사적 이유로 내륙을 돌아가는 루트로 결정된 노선이다. 1901년 1월 착공한 공사는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09년 개통했다. 처음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중국에서 데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899년 ‘외국인노동자배척법’이 제정되면서 중국 인력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조선인 노동자는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가지마구미(鹿島組, 현 가지마 건설)는 히사쓰 선 중에서도 야타케 터널 등 난공사 구간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가지마구미는 조선 지점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 150명을 고용했는데, 〈일본철도청부업사〉에 따르면 이는 일본 철도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를 최초로 고용한 사례다. 조선인들은 ‘경력자’였다. 가지마구미가 진두지휘해 1901년 8월 착공, 1905년 1월 개통한 경부철도 공사 경험자들이었다.

조선의 철도 공사 경력자들 중 40명이 1907년 10월30일 1진으로 히토요시에 도착했다. 40명으로 시작한 조선인 노동자는 1908년 4월이 되자 500명을 넘어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게 등을 사용한 운반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가지마구미는 조선인 덕분에 이전의 손실을 보전하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저임금으로 혹사시켰다는 방증이었다.

 

ⓒ안해룡(사진가)1920~1930년대 고베 전철 부설공사에는 1200~1800명에 이르는 조선인 노동자가 참여했다. 당시 신문 기사로 파악되는 조선인 사망 사건은 5건. 사진은 일본의 시민단체가 세운 ‘고베 전철 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상’. 노동자상 뒤편에는 파악된 희생자 13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오코바 역 구간을 공사하던 하자마구미 역시 가지마구미와 다르지 않다. 하자마구미는 1889년 4월에 설립돼 기타큐슈의 철도 공사를 담당하던 지역 토목회사였다.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발전 기반을 구축했다. 하자마구미는 가지마구미의 지원으로 조선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공사에 참여했다. 관설 공사에 투입된 건 처음이었다. 이후 오코바 역 구간 공사까지 이끌었다. 최길남씨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이었다.

히사쓰 선 부설 공사보다 앞서 조선인 노동자를 도입한 곳은 광산이다. 사가현 니시마쓰우라군에 있는 초자 탄광이 대표적이다. 초자 탄광은 1839년 채굴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선탄 산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 노동자 고용을 결정했다.

1897년 8월2일 인천항을 떠난 조선인 20명이 나가사키 항을 경유해 8월7일 초자 탄광에 도착했다. 8월11일 도착한 37명을 포함해 초자 탄광에 일하러 온 조선인 57명의 평균연령은 25.6세였다. 모두 채탄 경험이 없는 초보자였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조선인 노동자의 입갱률은 매우 높았고, 자연스럽게 채탄 성과도 올랐다. 이후 4회에 걸쳐 조선인 230명이 추가로 초자 탄광에 들어왔다.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와 격리되어 생활했다. 임금은 일본인에 비해 다소 낮은 수준이었지만, 채탄 도구 사용료를 임금에서 공제하는 등 임금을 중간에서 갈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전소, 댐마다 1000명 넘는 조선인이 일해

이처럼 일본 기업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조선인을 고용해왔다. 위험한 업무에 낮은 임금으로도 사람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탄광과 철도뿐만이 아니었다.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의 노동력 부족도 심각했다. 특히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시즈오카의 경우 발전소 공사로 온 조선인 노동자의 자녀들이 지역 소학교에 100명 넘게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안해룡(사진가)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는 조세이 해저탄광은 1914년부터 채굴을 시작했다. 1942년 2월3일 해수압의 영향으로 낙반하면서 수몰 사고가 일어났다. 해저 30m 아래에서 작업하던 광부 183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136명이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였다. 사고 이후 탄광은 폐쇄되었고, 이들의 시신은 아직도 바닷속 갱도에 묻혀 있다. 해저탄광과 연결된 두 개의 환기구만이 이곳에 탄광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른바 ‘모집인’이 조선 각지에 잠입한 것도 그즈음이다. 이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모인 농민들은 석탄 운반선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현해탄)을 건넜다. 기타큐슈 항에 도착해 심야를 틈타 옮겨 탄 트럭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렇게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착한 곳은 모집인이 말했던 대공장이 아니었다. 지쿠호 탄광 지역에 살면서 광산 노동자의 삶을 기록해온 논픽션 작가 우에노 에이신은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과정을 포착했다. 조선인들은 주로 밀항으로 입국했다. 우에노 에이신은 탄광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실어 나른 석탄 운반선을 ‘노예선’이라고 불렀다.

대다수 위령비는 일본 패전 뒤 건립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는 공사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빈번했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기된 위령비나 추모비는 많지 않았다. 건설 당시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던 시미즈 터널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조에쓰 선(上越線) 시미즈 터널 부근의 순직비에는 조선인 이름이 없다. 1920년대 조에쓰 선 건설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비석의 ‘기억’에는 담기지 않았다. 노동 현장이 학살 현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1922년 나가쓰가와(中津川)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본인 감독에 의해 자행된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 역시 추모비나 위령비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령비, 위령탑, 추모비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세워졌다.

 

ⓒ안해룡(사진가)오키나와 남부 마부니 언덕에 세워진 ‘평화의 초석’. 1995년 6월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국적이나 군인, 민간인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전몰자의 이름을 기록했다. 평화의 초석에는 일본인 22만6936명, 외국인 1만4587명 등 모두 24만152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북한 출신자 82명, 한국 출신자 380명도 이름이 새겨졌다. 지난 6월23일 ‘위령의 날’에 한국 출신자 이름 2명이 더해졌다.
ⓒ안해룡(사진가)오키나와현 나하시 슈리성 땅 밑으로는 오키나와 전투를 지휘하던 일본군 제32군 사령부의 지하호가 있다. 지하 30m 아래, 남북으로 390m에 이르는 지하호 건설에는 군 소속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다. 지하호 내부에 위안소도 있었다. 지하호 입구에는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이 평화를 염원하며 남기고 간 종이학 등이 있었다.


일본에 세워진 위령비와 추모비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와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총련과 민단으로 분리되었다. 해방 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위령비에서마저 분단의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탄광, 철도, 발전소 건설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 자본주의가 근대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완벽하고 값싼 불쏘시개였다. 조선인 이름 그대로, 또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때로는 이름조차 없이 세워진 비석은 조선인의 슬픈 이주사가 지닌 단면을 보여준다. 비문은 자본주의 수탈 역사나 제국주의 침략 역사, 학살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험난하고 열악한 조선인 노동 현장 역시 세월이 흘러 현재는 비경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비문에 적혀 있지 않은, 지워진 죽음은 역사와 공간을 통해 적극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이번 작업은 그 시도였다. 우리는 잊어버린 기억을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

 

일본 내 주요 ‘조선인 위령비’
ⓒ안해룡(사진가)도치기현 니코시에는 동광산으로 유명한 아시오 광산이 있다. 1940~1945년 8월까지 조선인 2416명이 강제동원되었다. ‘도치기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 화장 허가서 등을 조사해 조선인 73명이 사망한 기록을 찾아냈다. ‘아시오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 위령비’.
ⓒ안해룡(사진가)태풍 때 갱내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16세의 조선인 광부 강상구는 1981년 ‘신오사카 탄광 제3갱 순직자 위령의 비’(위)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신원 불상’이었다.
ⓒ안해룡(사진가)1995년 후쿠시마현 오무타시 아마기 공원 언덕에 세워진 ‘징용 희생자 위령비’
ⓒ안해룡(사진가)2009년 한국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사로 강상구라는 이름을 찾게 되는 과정이 위령비 뒷면에 쓰여 있다. 후쿠오카시 씨사이드 컨트리클럽 정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사이토자키 탄광 갱구 자리 안쪽으로 순직비가 있다.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 이름 3명, 창씨개명한 이름 6명이 있다.
ⓒ안해룡(사진가)후쿠시마현과 이바라키현에 걸쳐 있는 조반 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약 2만명에 달했다.
ⓒ안해룡(사진가)조선인 노동자 193명을 기리고 있는 ‘조선인 노무자 희생자의 비’는 1947년 10월22일 재일조선인연맹 주도로 건립됐다.
ⓒ안해룡(사진가)2013년 건립된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 1942년 2월3일 발생한 수몰사고 사망자 183명 가운데 136명이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였다. 조세이 탄광 환기구를 의미하는 상징물 기둥 2개에 ‘일본인 희생자’와 ‘강제연행 한국조선인 희생자’를 새겨넣었다.
ⓒ안해룡(사진가)도카이도 본선 단나 터널 공사에서 순직한 67명 노동자를 기리는 단나 터널 공사 ‘순직비’에는 조선인 노동자 이름 7명이 새겨져 있다.
ⓒ안해룡(사진가)나카쓰가와 발전소(위)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600여 명이었다. 1922년 7월 ‘지옥의 계곡’이라 불렸던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다 잡힌 조선인 노동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해룡(사진가)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오른쪽 사진은 당시 공사 자재를 실어 나르던 전차의 정류소(〈쓰난 백년사〉 1977).
ⓒ안해룡(사진가)니가타현 시나노카와 센주 발전소 부근에 세워진 ‘오키다테 순직비’. ‘安ヒ伏’이라고 한자와 히라가나를 섞어 새겨놓은 이름은 조선인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안해룡(사진가)1920~1930년대 시즈오카현 오이카와의 철도와 발전소 공사에는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투입됐다. 발전소 공사장에는 현장마다 1000~2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중부전력과 다이세이 건설이 건립한 ‘삼계만령탑’에는 사망자 12명 가운데 조선인 이름 3명이 새겨져 있다.
ⓒ안해룡(사진가)1944년 12월7일 도카이 지방에 규모 8의 강진이 일어났다. 군용기를 생산하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 공장의 건물은 거의 붕괴했다. 이 지진으로 57명이 사망했다. 이 중 6명은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돈도 벌게 하고 학교에도 다니게 해주겠다고 속여 데리고 온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이었다. 1987년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조사추도실행위원회가 피해자들을 조사하면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가 최초로 알려졌다.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이곳에 진실을 새긴다’라는 비명의 추도비는 1988년에 세워졌다. 공장이 매각되면서 추도비도 인근 병원 부지로 옮겨졌다. 2013년 11월18일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씨(사진 왼쪽)와 김중곤씨가 일본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추도비를 찾았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양금덕씨 등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미쓰비시가 1억~1억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김중곤씨는 지난 1월 별세했다.

 

 

 

기자명 글·사진 안해룡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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