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고 깨끗한 유치원 유리창에 그림물감으로 색칠을 한다는 건 내게는 그 유리를 깨버리는 것과 거의 같았다. (중략) 머뭇머뭇 유리창에 색칠을 하고 보니 햇빛에 비쳐 정말 아름다웠다. 금기를 깨는 불안과 그것을 해보는 쾌감, 두 가지가 다 있었다(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2014).”
이 아이가 커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된다.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일본 이름보다 영어식 표기 류이치 사카모토로 더 많이 불릴 만큼, 말 그대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다. 반골 기질을 타고난 다섯 살 꼬마는 ‘금기를 깨는 불안과 그것을 해보는 쾌감’을 동시에 추구하며 평생을 산다. 대략 60년 세월을 시대와 예술의 최전선에서 살아내다 맞이한 2012년의 어느 날. 그가 도쿄 수상관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날로부터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가 시작된다.
피아노 들고 재난 현장으로 가는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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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반대합니다. 재가동을 반대합니다.” 마이크 잡고 소리치는 사카모토 류이치. 괜히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그냥 침묵을 택하면 된다. 그런데도 앞장서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 “제 생각을 말하지 않고 속에 담아두는 게 더 힘들어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저는 절대 못하거든요.”
이제 이 세계적인 음악가는 피아노를 들고 재난 현장으로 간다. 동일본대지진 피해 지역 이와테 현 리쿠젠타카타 중학교에 주민들이 모인다. 재해 당시 임시 대피소였던 그곳에서 자신의 히트곡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연주한다.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악의 마법 같은 힘. 을씨년스러운 폐허의 밤이, 그 순간만은 잠시 봄이다.
정말 아름다워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특별 공연이 끝난 뒤, 다큐는 본격적으로 그의 삶을 탐구한다. 유치원 유리창에 수채화를 그리던 그 마음 그대로, 삶의 매 순간 금기를 깨고 새로움에 도전하며 만들어낸 삶의 궤적을 되짚는다.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영화 음악가이자 몇 편의 영화에 직접 출연한 배우,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이고 한때 전설의 일렉트로닉 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로 활동한 월드스타, 그리고 최근엔 한국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을 맡기도 한 사카모토 류이치가 직접 자신의 삶과 영화와 음악을 이야기한다. 세상이 ‘소음’으로 치부해버린 다양한 소리들로 근사한 음악을 짓는 최근 작업을 특히 중요하게 다룬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예술이란, ‘자신의 음악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통해 우리가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지구의 속삭임과 인간의 비명을 외면하지 않은 덕분에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여전히 청년일 수 있는 거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의 음악을 이미 좋아했지만 이 작품을 보고 나서 두 배는 더 좋아하게 되었다. 6월14일 개봉하는 다큐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10월14일까지 계속되는 전시 <류이치 사카모토: 라이프, 라이프>와 함께 볼 때 더 좋다. 물론, 둘 중 하나만 보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을 테지만.